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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에도 질이 있다. 교대로 근무를 서는 경호원의 특성상, 그리고 왕자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위치상 테타는 제 시간에 푹 자본 적이 별로 없었다. 계승전 때문에 배에 탄 이후로는 더욱. 덕분에 남들 다 자는 시간에 푹 잘 수 있다는 건 테타에게 있어 휴가만큼 귀중해, 오늘 같은 날이 오면 보너스를 받는 것보다 괜히 더 설레게 되는 것이다. , 간만에 사람답게 자보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는 테타를 보다 못한 동료들이 왕자에겐 말해 놓을 테니 좀 쉬라며 대신 보초를 서준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봤자 왕자한테서 호출이 오면 바로 나가봐야 하지만. 에이, 아무리 왕자님이 남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라지만 설마 피곤해서 겨우 쉬고 있는 사람을 부르겠어? 욕실에서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워 막 잠에 들려던 참이었다. 휴대폰이 짧게 진동하며 여러번 우우웅- 소리를 냈다.

-테타

-

-왕자가 너 찾아

-테타, 빨리

보기만 해도 다급함이 느껴지는 문자였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 밤에 안 자고 왜 굳이 날 찾는 거야. 어깨가 뻐근하고 뒷목이 땡기는 게 모르는 척 그냥 엎어져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배째라는 식으로 무시하고 내일 한소리 듣는 걸 택했겠지만 상대는 체리드니히였다. 배째라는 식으로 나갔다가 정말 배가 째지게 될 수도 있었다. 하아아-. 테타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급하게 정장으로 갈아입고 체리드니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얼마 전에 12왕자가 살해당했잖아? 그게 너~! 무서워서 혼자서 못 자겠어.”

어쩌라고. 테타는 딱딱한 표정을 더 딱딱하게 굳히고는 뒷짐을 진 채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무섭다니. 따로 방으로 불러내길래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다른 왕자라면 납득하겠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제 4왕자였다. 누구보다 체리드니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테타였기에 그가 누구보다 열심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실제로 오늘 넨을 가르칠 때만 해도 이제야 실감이 나는 게 재밌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던가. 원래도 유독 사람을 귀찮게 하던 그였지만 테타가 넨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로 그 빈도가 부쩍 늘어난 요즘이었다. 가장 신뢰하는 부하가 자신 때문에 온갖 약을 달고 산다는 걸 왕자는 알까. 이 이상 약을 늘리는 건 사양이었다. 체리드니히 앞이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말씀하셔도……사르코프라도 부를까요.”

테타쨩은 날 사르코프한테 맡기고도 안심이 돼?! 내가 걱정도 안 돼?”

걱정 안 되냐니. 당신이 뽑았잖아. 사르코프는 대화하다 보면 가끔 답답할 때가 있어서 그렇지 절대 무능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렇게 보여도 일단 제 4왕자의 경호원이다. 약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사람을 자르던 그의 밑에서 아직까지 사지 멀쩡하게 있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유능한 지 알 수 있었다. 본인이 뽑은 경호원을 이제 와서 못 믿는 건 아닐 거고, 정말 무서워서 그러는 건 더더욱 아닐 테니 체리드니히의 목적은 아마 테타 자신이리라.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건 그와 별개의 일. 노골적으로 속을 드러내며 자신을 쳐다보는 체리드니히의 시선에 테타는 하마터면 눈을 피할 뻔했다.

……같은 방에서 자면 되는 거죠?”

너 지금 뭐라는 거냐? 미간을 찌푸린 채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게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긴장한 탓에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테타는 뒷짐을 진 채 축축한 손으로 정장 마이를 꽉 붙잡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테타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자 체리드니히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곤 자기 침대를 두드렸다.

왕자님, 그건 좀…….”

말이 많네. , 내가 지금 네 의사를 묻는 것 같아?”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게 대체 뭐하는 건지. 테타는 불을 끄곤 왕자의 옆에 누운 채 천장을 응시했다. 아득하게 높은 게 도무지 배 안이라고는 믿기지 않아, 어째서인지 괜히 숨이 막히는 게 되려 천장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체리드니히의 시선 역시 한몫했으리라. 괜히 상대해줬다간 더 귀찮아질 뿐이라는 걸 오랜 세월에 걸쳐 깨달은 테타는 체리드니히를 마주보는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테타.”

자신을 부르는 체리드니히의 목소리에 테타는 여전히 눈을 감고선 대답했다.

.”

그러고 잘 거야? 위에 마이라도 벗지 그래?”

괜찮습니다.”

아니면 내가 벗겨줄까?”

…….”

졌다. 졌어. 탁자 위의 스탠드를 켠 테타는 몸을 일으킨 후 정장 마이를 벗곤 잘 개어 탁자에 올려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체리드니히가 끈적한 손길로 테타의 등을 쓸어내렸다. 와이셔츠 위로 느껴지는 손길에 머리털이 쭈뼛 선다.

브래지어는 안 풀어?”

침착하자. 어설프게 반응하면 할수록 상황만 더 안 좋아질 뿐이야. 테타는 체리드니히에게 등을 돌리지도, 체리드니히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서지도 않은 채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연주홍빛 스탠드 조명이 야릇한 분위기를 더했다. 단추가 하나씩 풀어질 때마다 체리드니히의 시선 역시 아래로 향하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셔츠를 벗고, 브래지어 후크를 풀고, 다시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고, 벗은 브래지어를 개켜놓은 정장 위에 올려놓는 동안 테타의 얼굴에선 조금의 수치심이나 당혹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만 잘까요.”

흰색이구나. 테타답다면 테타답네.”

불 끄겠습니다.”

체리드니히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테타는 긍정으로 받아들이곤 스탠드를 껐다.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어둠이 방안에 짙게 깔렸다. 바로 등을 돌리고 싶었지만 왕자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으니 관두기로 했다. 조금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기간 쌓인 피로로 막 잠에 들려던 참이었다.

테타, ?”

대답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진짜 자?”

시간이 늦었습니다. 내일도 넨 수행을 해야 하니 이만 주무세요.”

무서워서 잠이 안 와.”

아 진짜 좀! 테타는 구겨진 휴지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컴컴한 탓에 체리드니히가 테타의 실루엣만 겨우 볼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치아에 혀가 딱 달라붙어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찰까봐 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오늘도 제 시간에 자긴 글렀구나. 꿈 한번 안 꾸고,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는 건 바라지도 않았는데. 사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게 아닐까? 어둠 속에서 침대 옆 탁자를 더듬거리며 스탠드 전원 부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연주홍빛 조명이 들어와 둘을 비췄다.

동화책이라도 읽어드릴까요.”

아하하! ? 테타쨩이 직접 읽어주는 거야?”

그거 진짜 웃긴다-. 한참 키득대던 체리드니히는 눈물 닦는 시늉까지 해보이며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길 나이는 이제 지났을 텐데. 대체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농담으로 한 말이 맞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웃을 일인가. 테타로선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싫으시다면 다른…….”

아니, 아니……좋네. 어디 한번 해봐.”

농담이었는데.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기에 내심 당황한 테타는 침착하게 방 밖의 사르코프에게 연락을 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르코프는 선내의 도서관에서 가져온 동화책을 체리드니히에게 건넸다. 얇은 동화책엔 다리가 지느러미인 여자아이 그림과 함께 큼직하게 인어공주란 네글자가 박혀 있었다. 스탠드 조명만 켜진 방 안에서도 사르코프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잘 보였다. 이게 대체 뭐야? 그렇게 묻는 듯한 사르코프의 표정은 이내 탁자 위, 자신이 선물한 브래지어를 발견하곤 급격하게 어두워졌고 눈썰미 좋은 테타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미묘하게 축 처진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 밤이 지나고 어떻게 오해를 풀어야 할지 생각하자니 벌써부터 위가 꼬이는 기분이었다. 허나 그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눈앞의 왕자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진짜? 정말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안 믿기는 게 현실감이 없었다. 테타가 혼란스러워 하거나 말거나 체리드니히는 사르코프가 가져온 동화책을 이리저리 살펴보곤 테타에게 건넬 뿐이었다.

읽어.”

?”

읽으라고. 읽어준다며?”

진심이세요? 테타는 체리드니히를 한번 쳐다보더니 어느새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그의 얼굴을 보고는 마지못해 동화책을 펼쳤다.

……아주 먼 옛날 바닷속 깊은 곳에 인어공주가 살고 있었어요.”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떨리는 게 애처로웠다. 첫 문장을 읽고 잠시 말을 멈춘 테타는 체리드니히를 바라봤다. 계속 할까요. 테타의 물음에 체리드니히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걸로 대신 대답했다. 테타는 아예 체리드니히쪽으로 몸을 향한 뒤 목소리를 가다듬곤 마저 읽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음정에 체리드니히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테타의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

평생을 바닷속에서만 살아온 인어공주에겐 오랜 소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육지에 올라가보는 것이었어요. 아버지, 육지로 올라가보고 싶어요. 잠깐이라도 좋아요. 딱 한 번만요. 허나 막내딸인 인어공주를 끔찍이 사랑한 용왕은 그 소원만큼은 들어줄 수가 없었어요. 육지는 몹시 위험한 곳이었거든요. 사랑하는 내 딸 인어공주야…….”

그만, 됐어.”

무슨 문제라도?”

아니. 어떤 느낌인지 이제 알았으니까 됐다고. 잘 거니까 불이나 꺼.”

뭘 알았다는 건지, 자신도 모르게 실수하진 않았는지, 오늘따라 유독 이상하게 구는 이유는 또 뭔지 궁금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한낱 경호원인 테타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알겠습니다.”

조명을 끄자 방안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익숙해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쳤어. 테타는 조심스레 체리드니히에게 등을 돌렸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베개에 뺨이 닿는 게 기분 좋았다. 눈을 감고 막 잠에 들려던 참이었다. 체리드니히가 뒤에서 허리를 껴안았다.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사르코프의 오해가 더 이상 오해로 남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에선 경고음이 울렸다.

어때?”

, ……?”

안 불편하냐고.”

불편한 것보단 무서운 게 더 큰 테타였다. 잠이 확 달아났다. 테타는 당혹감에 뭐라 해야 할지 말을 골랐고, 체리드니히는 잠깐의 침묵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재촉하듯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됐어.”

체리드니히는 그렇게 말하곤 테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 .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는 자신의 심장과 달리 등에서 느껴지는 체리드니히의 심장박동은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테타가 겨우 숨을 가다듬었을 때 체리드니히가 입을 열었다.

테타.”

.”

이번 침묵은 체리드니히의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한참 뜸을 들이던 그가 내뱉은 말은 테타가 잔뜩 긴장한 게 우스울 만큼 별 거 아닌 것이었다.

잘 자.”

그답지 않은 심심하고 정상적인 인사에 절로 맥이 빠졌다. 오늘은 정말 유독 이상한 날이야. 자신의 허리를 껴안은 팔에 조금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지만 위협적이진 않은 밤이었다. 테타는 여전히 체리드니히에게 안긴 채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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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꾸웅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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