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4. 20:24 헌헌
[키르곤] 박제사 조르딕가
제가 쓰는 2차 창작 글에선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 원치 않은 결혼, 폭언, 폭력, 생명경시, 자살 및 자살사고, 가스라이팅 등 비윤리적 요소※가 자주 등장하며, 열람 후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일절 책임지지 않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들의 죽음으로 살아가는 조르딕 가에선 생전 살아 숨쉬던 거라면 그게 뭐든지 박제했다. 나비나 풍뎅이 같은 곤충부터 사슴이나 곰은 물론이요, 죽은 반려동물에 사고나 병으로 세상을 떠난 연인까지. 대상이 무엇이든 이미 죽은 것이기만 하면 가리는 것 없이 모두 받았는데 그렇다고 꼭 죽은 것만 받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어디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니. 간혹 살아있는 걸 의뢰하는 손님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실버 조르딕은 손님을 정중히 돌려보내곤 했고, 대부분 군말 없이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가격을 몇 배로 높여 부르는 손님이 있으면 마지못해 승낙하는 것이었다.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키르아는 죽은 것만 취급한다던 장사 철학도 돈 앞에선 소용없다며 속으로 비웃곤 했다.
가업으로 박제를 하는 집답게 집안 곳곳에는 박제품이 널려 있었는데 가업 잇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키르아의 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벽에는 포스터 대신 형형색색의 나비 표본들이 걸려 있었고, 장식장엔 인형이나 피규어 대신 한때 기르던 애완동물들이 생전의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두 키르아가 직접 박제한 것들이었다. 키르아는 한쪽 의안이 제대로 끼워지지 않은 강아지 박제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은 털의 감촉이 부드러운 게 아직도 살아있는 것 같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지만 맨 처음 박제를 하던 날이 어제처럼 선명했다.
꼭 아름답지 않아도 좋아. 키르, 네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면 돼. 평소 애완동물 같은 건 불필요하다고 말하던 이르미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신의 손을 잡고 펫샵으로 데려가던 걸 기억한다. 아직 어렸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즐거운 마음으로 가게 안을 둘러봤고 이내 털이 복슬복슬한 리트리버 한 마리를 품에 껴안고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 애로 할래. 크기가 커서 힘들지 않겠어? 뭐가? 아무것도 아냐. 왜 그때 자신은 그게 무슨 뜻인지 끝까지 추궁하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이르미의 말이 맞았다. 리트리버는 크기가 지나치게 큰 탓에 처음 박제하기엔 적합하지 않아 망치고 말았으니. 키르아는 제 손으로 박제하게 될 거라곤 꿈도 못 꾼 채 새끼 리트리버를 참 열심히도 돌봤고, 키르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리트리버는 성견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사상충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르미의 말을 따라 제 손으로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좀 진정되는 것 같다가도 금방 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는데 그때마다 이르미는 위로를 해주는 대신 작품이 망가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할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미친놈이야. 간만에 떠오른 기억에 키르아는 아직도 치가 떨린 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정신병자 같은 집안에 정신병자 같은 의뢰를 맡기는 손님 역시 죄다 정신병자임이 분명하다고 키르아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기 또래의 남자아이가 울면서 죽은 곰 사체를 질질 끌고 찾아오기 전까지는. 우으……이, 이런 것도 해줘? 그렇게 말하던 소년의 조그마한 어깨는 잘게 떨렸고 커다란 연갈색 눈동자에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여지껏 살면서 키르아가 본 손님들은 죄다 나이깨나 먹은 사람이었기에 자기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에게 흥미를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돈은? 키르아의 말에 소년은 훌쩍훌쩍 울면서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를 건넸다. 곰은 커녕 곤충 박제를 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지만 키르아는 군말 없이 돈을 건네받았다. 너, 몇 살이야? 열두 살……. 동갑이네. 으음, 잠깐 안으로 들어올래?
누군가를 방 안으로 데려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키르아는 괜히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저건 다 네가 직접 한 거야? 응.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키르아의 걱정과 달리 소년은 꼭 살아있는 것 같다며 감탄을 내뱉었다. 넌 이름이 뭐야? 키르아 조르딕. 이름 멋지다~. 소년은 자신의 이름은 곤 프릭스이며 이모와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고, 어머니는 아주 어릴 때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며 의뢰를 맡긴 곰은 어릴 적부터 같이 지낸 친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릴 적 만난 아버지 아는 사람에 대한 것, 자신 때문에 콘타가 부모를 잃은 것, 이모가 자신의 아버지를 무척 싫어하는 것과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아버지에게 애착이 가는 것 등 키르아가 묻지도 않은 것을 혼자 잘도 떠들어댔고, 키르아는 곤이 말할 때마다 헤에, 흐응, 같은 호응을 해주거나 자신의 가족이 죄다 정신이상자라는 것, 그 중에서도 첫째 형은 사이코패스가 틀림없다는 것, 얼마 전 의뢰를 맡긴 손님이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것과 자신은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 등 자신에 대한 것을 말해주었고 둘의 대화는 창밖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겨우 끝날 수 있었다.
-저기, 종종 놀러 와도 돼? 나, 동갑 친구가 없거든. 키르아가 처음이야. 작업하는 것도 궁금하고…….
안될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종종 놀러 와도 되냐는 곤은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고, 당장이라도 내쫓을 줄 알았던 가족들은 의외로 곤이 놀러올 때마다 차나 과자 같은 걸 내어와 키르아를 놀라게 했다. 금방 끝나니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키르아의 말에 곤은 얌전히 방에서 기다리는 대신 끈질기게 키르아를 따라와 이르미의 차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작업하는 걸 구경했고, 가죽을 벗겨내고 지방질을 떼어내는 과정에 비위가 상할 법도 한데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석고로 심을 만들 때엔 손재주가 좋다며 키르아를 칭찬하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평생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작업도 어느새 끝이 났다. 크기가 큰 것도 있지만 첫날 곤이 질질 끌고 오느라 가죽이 다 상한 게 시간을 잡아먹은 결정적인 이유였다. 곤은 몇 달에 걸쳐 완성된 자신의 오랜 친구를 말없이 가만 쳐다보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콘타가 살아있던 때랑 똑같아.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조르딕 가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키르아가 이번 작업을 위해 곰의 생태에 대해 매일 밤을 새며 알아봤으니. 마음에 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응……키르아, 정말 고마워. 그나저나 곤, 너 이걸 어떻게 가져가려고? 키르아 그래서 말인데,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줄 수 있을까?
곤의 부탁은 까다롭다면 까다롭고 쉽다면 쉬운 것이었다. 자신의 집에선 보관하기 힘드니 키르아가 맡아주면 안 되냐는 것이었는데 눈치 빠른 키르아는 이게 자신을 만나러 오기 위한 구실이라는 걸 알아챘다. 별 수 없다는 듯 승낙한 그날 밤, 키르아는 연인과 사귀게 된 첫날처럼 괜히 가슴이 뛰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반짝이는 금발과 타는 듯한 붉은 눈이 인상적인 손님이었다. 행색과 관을 들고 뒤따라 온 몇 명의 남자들을 보아하니 마피아의 보스나 그 비슷한 사람일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작업한 적은 없지만 보석처럼 아름다운 그 눈을 키르아는 언젠가 본 기억이 있다. 결코 흔한 색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단 말이야. 남자가 손짓하자 부하직원 하나가 조심스런 손길로 관 뚜껑을 열었고, 안엔 미형의 흑발 남성이 꼭 자는 것처럼 누워 있었다. 그래. 분명 본 적 있어. 자신이 아직 작업을 하기 전, 이르미에게 의뢰를 맡긴 자였다. 실례지만 어떤 사이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르미가 의뢰인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다니 드문 일이었다. 제 형의 말에 남자는 가게에 찾아온 대부분의 손님이 그랬듯이 한참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친한 친구를 잃고 상실감에 젖은 제게 찾아온 첫사랑이였어요. 손버릇이 무척 나쁜……. 당시에 전 행방불명된 친구가 머리가 잘린 채로 발견돼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그에게 많은 심리적 도움을 받았고 그러다 사랑에 빠지게 됐습니다. 제 친구 말인가요. 아실 지도 모르겠네요. 몇 번 뉴스에도 나오고 한 사건이니까요. 네, 맞아요. 제 친구는 쿠르타 족이에요. 저도 그렇고. 감정이 격해지면 지금처럼 눈이 붉게 변하는. 사람들은 저희 눈을 보고 세계 7대 미색이라고 부르더군요. 무척 아름답다고. 제 연인도 마찬가지였어요. 서로 사랑을 속삭이다 제 눈이 붉게 변하면 절 산 채로 박제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조금 꺼림칙한 말이지만 그 사람 나름대로의 애정이 느껴지는 게 싫지 않았어요. 제가 어제 그를 죽이기 전까지는요. 어제는……어제는 저희의 기념일이었어요. 둘 다 와인을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해 몸을 섞던 중이었습니다. 평소처럼 그의 요구에 목을 조르는데 그가 기분이 좋은지 제 눈가를 매만지며 입을 열더군요. 네 또래의 아이였어. 너처럼 붉은 눈을 가진, 흑갈색 머리카락의……그땐 그게 너무 가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막상 손에 넣으니까 별 감흥이 없더라고. 널 만나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원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 말야. 술에 취했지만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목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손을 놓았을 땐 그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어요. 네.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일이죠. 늘 산 채로 절 박제하고 싶다 말하던 당사자가 박제될 줄은 저도, 그 사람도 몰랐으니까요.
곤은 키르아가 말해준 손님의 얘기를 가만히 듣더니 입을 열었다. 그 손님은 어떤 얼굴로 의뢰를 맡겼어?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얼굴이었어. 그렇구나……있지 키르아, 나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 키르아는 부탁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며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어보였고, 곤은 그런 키르아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진짜 마지막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나중에 내가 죽게 되면 키르아가 작업을 해주면 좋겠어. 정말이지 꺼림칙한 부탁이었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그 전에 내가 가업을 관두면 어쩌려고? 그건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바보 아냐? 그렇게 말하던 키르아는 몇 년 후 제 손으로 곤을 박제하게 되지만 그건 아직 한참 뒤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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