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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25. 23:57

[체리테타]0.0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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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으으…….”

체리드니히의 입에서 연신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독감이었다. 며칠 전부터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인다며 무리하지 말라는 테타의 말에 코웃음을 치던 그는 현재 오한에 떨고 있었다. 이불을 목 끝까지 덮었는데도 추위에 이가 딱딱 맞부딪쳤다. 이마 위에 얹어진 물수건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질 새면 테타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물수건을 뺏어갔다. 체리드니히는 야속하다는 듯 가습기가 내뿜는 뿌연 김 너머로 테타를 노려봤다. 체리드니히와 눈이 마주친 테타는 웃지도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은 채 무표정으로 얼음물에 담긴 수건을 비틀어 짤 뿐이었다. 뚝뚝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이마 위에 차가운 물수건이 얹어졌다. 차가움에 힉, 소리가 나오고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게 제가 무리하지 말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뱉은 테타는 빨갛게 얼어붙은 손등을 체리드니히의 뺨에 갖다 댔다. 열이 펄펄 끓는 환자답게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연락을 안 받기에 직접 깨우러 갔더니 고열로 죽은 듯 누워 있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끙끙 앓는 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아마 정말로 죽은 줄 알았을 테지. 급한 대로 사람을 불러 주사를 놨다. 의사는 열이 38도에서 39도를 왔다 갔다 하니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약을 처방해주곤 돌아갔다. 반드시 식사 후에 복용하라는 말과 함께.

테타, 나 죽을 거 같아…….”

주사가 좋긴 좋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 이젠 저렇게 말을 내뱉는 걸 보면. 테타는 한 번 더 물수건을 갈아준 뒤 체리드니히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이제 조금 아파보일 뿐,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 정도로 죽진 않습니다.”

, 콜록, 너무한 거 아냐?”

평소엔 그렇게 오만방자하던 사람이 지금은 침대에 누워 죽는 소리나 하고 있다니. 테타는 희열과 약간의 동정심에 체리드니히의 얼굴을 매만졌다. 자신의 손이 차가운지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차가워…….”

뭐라도 드셔야 합니다.”

아무 것도 먹기 싫어…….”

죽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먹기 싫다는 체리드니히의 말에 테타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더니 곧 베드트레이에 죽과 물, 수저를 담아서 돌아왔다. 테타가 침대 위에 베드트레이를 올리곤 스푼으로 죽을 휘휘 저어 식히는 동안 체리드니히는 말없이 스푼을 쥔 테타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거 테타가 만든 거야?”

그럴 리가요. 죽 드셔야죠. 일어나세요.”

테타쨩이 만든 게 먹고 싶은데.”

테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되도 않는 소리를 해대는 걸 보니 이제 좀 살만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헛소리나 지껄일 줄 알았으면 죽든 말든 그냥 놔두는 거였는데. 테타는 대답 대신 스푼으로 죽을 뜬 채 체리드니히의 입가에 갖다 댔다. 고용인이 만든 죽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났다. 사람의 입은 먹고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던데 체리드니히는 먹는 용도로는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콜록, 네가 만든 게 먹고 싶다고.”

……알겠습니다.”

죽그릇을 들고 나간 테타는 금세 다른 그릇을 들고는 돌아왔다. 아까와 똑같은 냄새에 체리드니히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요리를 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죽 만드는 데에 못해도 오 분 이상은 걸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십분 뒤에 들어오는 성의라도 보이던가. 체리드니히의 열렬한 시선에도 테타는 태연한 얼굴로 스푼으로 죽을 떠 그에게 건넸다. 귀찮아 죽겠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테타…….”

.”

, 내가 지금 바보로 보이냐……?”

?”

이거 그릇만 바꾼 거잖아…….”

체리드니히의 말에 테타는 입안의 살점을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표정관리가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스트레스로 뒷목이 뻣뻣해지고 숨이 가빠왔다. 제삼자가 보기엔 그저 아픈 사람이 부리는 어리광이었지만 지독한 직장상사의 부하직원인 테타 입장에선 그저 성가실 뿐이었다. 테타는 스푼을 들고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이내 그릇을 들고 말없이 방을 나섰다. 아예 밖에서 레토르트 죽을 새로 사올 생각이었다. 그런 테타가 직접 죽을 끓여 체리드니히게 갖다 바치게 되는 건 정확히 네 번 퇴짜를 맞은 후의 일이다.

 

 

 

2.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4왕자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던 테타는 마지막 칸에서 발을 헛디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엎어져 한참을 누워있어야 했다. 바짓단 밑으로 드러난 발목이 벌에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빠른 속도로 붓기 시작했다. 일어설 수 있겠냐며 테타에게 손을 건넨 체리드니히는 보기 드물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아, …….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어도 극심한 고통에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막을 순 없었다. 체리드니히의 앞만 아니었다면 온갖 비속어와 함께 아프다며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테타는 거친 숨을 내쉬며 체리드니히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반대쪽 다리에 힘을 줘 겨우 일어서는데 성공했지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다친 발목이 욱신거려 양손으로 체리드니히의 팔을 붙들어야 했다. 테타에게 한쪽 팔을 내어준 체리드니히가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업혀.”

, ?”

업히라고.”

붙잡힌 팔을 빼낸 체리드니히는 테타가 업히기 쉽도록 아예 허리까지 숙여가며 테타를 쳐다봤다. 테타쨩, 빨리~. 자신에게 등을 내준 채 다그치는 체리드니히의 모습에 테타는 이게 진심인지 장난으로 하는 말인지 혼란스러웠고 체리드니히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테타쨩에서 테타로 바뀌고 나서야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왕자님, 제가, 제가 감히 어떻게…….”

미친 사람이라 종종 잊곤 했지만 체리드니히는 저래 봬도 카킹국 1왕비의 아들, 4왕자다. 그에 비해 테타는 한낱 경호원에 불과했다. 업히자니 새삼 신분차가 피부에 와 닿고, 그렇다고 그의 말을 거스르자니 뒷일이 무서웠다. 멀쩡한 한쪽 다리로 겨우 서 있는 테타를 보다 못한 체리드니히가 한숨을 푹 내쉬곤 테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고통과 긴장으로 위축된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는 테타의 허리와 허벅지 뒤쪽에 손을 넣곤 단숨에 들어올렸다.

이게 무슨……!”

그러게 업히라고 할 때 업혔으면 좋았잖아.”

체리드니히에게 안긴 테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걸을 수 있습니다, 내려주세요. 테타의 요구에도 체리드니히는 아랑곳 않고 테타를 안은 채 걸어갈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달리 허리와 허벅지를 붙잡은 손은 크고 단단했다. 테타쨩, 살 좀 쪄야겠다~여태까지 일은 대체 어떻게 했어? 능청스럽게 말하는 얼굴에선 조금의 힘든 기색도 찾을 수 없었다. 누가 볼까 두려워, 가슴이 뛰는 날이었다.

 

 

 

3.

테타쨩 말야~, 테타는~, 테타쨩이~, 테타, 테타, 테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다 보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그여도 제 4왕자가 테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된다. 사랑에 빠진 여고생처럼 하루 종일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체리드니히의 모습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는 사람의 손톱과 발톱 중 어느 걸 뽑을지 고민하던 사람이 지금은 테타에게 어떤 색깔의 매니큐어가 어울릴 지 같은 거나 고민하고 있다니. 이 자식도 꼴에 사람이라고 결국 사랑 앞에선 어쩔 수 없구나. 사르코프는 새삼 사랑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테타에게 푹 빠진 그는 최근 좋아하던 행위예술도 마다하고 사르코프에게 테타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거나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에 대해 얘기하느라 바빴다. 이대로라면 그가 개과천선하게 되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다.

네가 보기엔 어때? 어느 색이 더 어울릴 거 같아?”

어울리는 건 모르겠고……테타는 이런 색 좋아하던데요.”

사르코프는 테이블 위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매니큐어 중 펄이 들어가지 않은 라벤더 색 매니큐어를 집어 체리드니히에게 건넸다. 체리드니히는 사르코프가 고른 매니큐어를 불빛 아래 이리저리 돌려보며 옅게 미소를 짓더니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말이 올려놓은 거지 사실 내던지는 수준이었다. 사르코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색이 마음에 안 드나? 자기가 골라보라고 했잖아.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어울리는 걸 모르겠다고 해서? 아니 그래도 그렇지 고작 그런 이유로 화난 거면 너무 또라이 같은데? , 원래 또라이 맞지.

전부터 생각한 건데-.”

.”

사르코프는-.”

.”

테타랑 많이 친한가봐? 그런 것까지 다 알고.”

.”

평소에 생각 좀 하고 살아라. 그렇게 말하던 테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흐응-.”

실수했다. 긴장한 탓에 목에 힘이 들어가 뻣뻣해 괴로웠다. 우둑, 소리가 나게끔 목을 꺾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따닥. . 따닥. . .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건 그가 수틀릴 때마다 하던 행동이었다. 무의식적인 습관이라기 보단 나 지금 기분 언짢으니 주의하라는 경고에 가까웠다. 사르코프는 테이블 위에 늘어진 매니큐어가 몇 개인지 세기 시작했다. 대충 봐도 서른 개는 훌쩍 넘어 보였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가 작고 단단한 유리로 된 케이스는 사람의 머리를 후려갈겨도 쉽게 깨질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길고 짧음을 재자면 아마 사르코프의 머리가 먼저 깨지리라.

, ? 아뇨? 별로 안 친합니다. 사실 별로가 아니라 많이 안 친합니다. 직장 동료 중 테타가 가장 대하기 껄끄럽습니다.”

, 너 없으면 나 혼자 저 미친 놈 어떻게 상대하라고. 테타가 퇴사하고 싶다며 푸념을 늘어놓을 때마다 사르코프가 내뱉던 말이었다. 다른 동료들 앞이라면 미친놈이니 또라이 새끼 같은 말은 감히 하지도 못했겠지만 테타 앞에서 만큼은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 만큼 사르코프는 테타와 친근한 사이였다. 너 퇴사하면 나도 퇴사하거나 아니면 목매달고 자살한다. 그렇게 말하던 그는 지금 자신이 테타와 얼마나 친하지 않으며 혹여 그림자라도 밟을까 퇴근할 땐 멀찍이 피해서 다니고 사적인 만남은 단 한 번도 가진 적 없다고 말해야 했다. . . 테이블에 손톱 부딪히는 소리가 멈출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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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꾸웅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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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 있어.”

고민요?”

따로 할 말이 있다기에 대체 뭔가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사르코프는 벙찐 얼굴로 체리드니히를 바라봤다. 고민? 이 사람이 고민할만한 게 대체 뭐가 있지? 인생이 너무 잘 풀리는 거? , 명예, 권력 세 마리 토끼를 다 손에 넣은 거? 내면이 어찌됐든 간에 대외적인 이미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거? 얼마 전 그와 결혼한 테타라면 몰라도 제 4왕자에게 고민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가 고민할 일이 뭔지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사르코프의 멍청한 얼굴을 앞에 두고 체리드니히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테타가 나한테 관심을 전혀 안 줘. 날 좋아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결혼하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했는데 결혼하기 전이랑 똑같아. 어르고 달래고 협박을 해봐도 전혀 소용이 없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신혼인데 어떻게 이러지?”

관심을 안 준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테타가? 사르코프의 기억 속 테타는 36524시간 조금도 쉬지 않고 온 신경을 체리드니히에게 몰두한 사람이었다. 아마 유년시절 그의 부모도 그렇게까지 관심을 쏟진 않았으리라. 그런데 관심을 안 준다니. 혹시 자신이 테타를 좋아했던 걸 눈치 채고 돌려서 엿을 먹이는 건가 싶어 그의 안색을 살펴봤지만 아무래도 진심인 듯했다.

이런 말하긴 싫지만 사르코프가 그나마 테타랑 친했잖아. 무슨 방법 없어?”

방법이요?”

솔직히 알려주고 싶지 않다. 자신이 짝사랑하던 여자를 보란 듯이 혼전임신으로 데려가 놓고 결혼에 성공하자마자 애를 지워버리는 미친 인간에게 사르코프는 그 무엇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테타는 단순한 사고라고 말했지만 테타만큼이나 오래 체리드니히를 지켜본 사르코프는 그게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야 늘 그림자처럼 테타 옆에 딱 붙어 다니던 사람이 사고가 난 그 날만큼은 곁에 없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자비가 한 명의 경호원도 대동하지 않은 채 길을 걷다 교통사고로 아이를 유산할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아이는 유산됐지만 몸에 이상은 없대. 불행 중 다행이지. 병실 밖에서 그렇게 말하던 체리드니히가 짐짓 슬픈 표정을 짓던 걸 기억한다. 그것 참……유감이네요. , 아이는 또 가지면 되는 거니까. 체리드니히의 목소리가 조금 들떠있었던 것도. 물론 그 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간만에 떠오른 기억에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뒷목이 뻣뻣해져온다. 황금 같은 주말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 남편의 고민상담이라니. 그것도 멀쩡한 놈이면 좀 나을 텐데 말야. 답답함에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르코프는 체리드니히의 멱살을 붙잡는 대신 테이블에 놓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기분 탓인지 커피 맛이 평소보다 훨씬 쓰다.

테타라면…….”

?”

결혼생활은 어때? 그 자식이 잘해줘? 맞고 사는 거 아니지? , 걱정했던 거랑 달리 엄청 잘해줘. 잘 지내지 못한다는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었는데.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봐왔기에 안다. 테타의 그 말에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았음을.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던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어찌나 눈에 거슬리던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에 며칠을 뜬 눈으로 보냈는지 모른다. 왜 자신만 이렇게 비참해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사르코프는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테타를 위해서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지만 문득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고통은 아니더라도 비슷하게나마 고통을 느꼈으면 했다. 정말 별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테타라면 죽여버린다는 말보다는 자살하겠다는 말이 더 잘 먹힐걸요.”

훗날 사르코프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테타는 야생동물을 구조하듯 조심스럽게 체리드히쪽으로 한발 한발 다가갔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목에 갖다 댄 칼을 냅다 뺏어 집어던진 게 고작 사흘 전의 일이다. 죽어버리겠다며 자살 소동을 벌인 횟수가 이번 달에만 벌써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나 사랑하냐고.”

사랑……사랑하니까 일단 칼부터 내려놓고 얘기하죠.”

목에 바짝 붙은 칼날이 섬뜩하게 번쩍인다. 차라리 자신의 목에 칼을 갖다 댔으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으리라. 혹여나 생채기라도 나면 어쩌나하는 마음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장난해? 좀 더 진심을 담아서 말해. 안 그러면 나 죽어버릴 거니까.”

이런 상황에 처한 테타야 말로 정말이지 죽어버리고 싶었다. 뭘 얼마나 더 진심을 담으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쩌겠는가. 결혼하기 전에도, 그리고 결혼한 지금도 테타는 어디까지나 까라면 까고 구르라면 굴러야 하는 을이었다. 진심을 담아서 말하라는 그의 말에 테타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비위를 맞추는 것뿐이었다.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왕자님 제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자신을 보는 체리드니히의 표정에 테타는 아예 무릎까지 꿇고 애원해야 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달달한 신혼생활을 만끽했다는 게 정말 거짓말 같았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됐더라. 맨 처음엔 밧줄이었다. 자신이 오길 기다린 것처럼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의자를 밟고 목을 매려는 체리드니히에게 달려들어 붙잡고 엉엉 울었었다. 그 다음은 수면제였고 그 다음은 권총, 또 그 다음은 청산가리……. 왕자는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자살하는 방법도 겹치지 않고 매번 가지각색이었고 이는 테타를 지치게 만든다는 걸 체리드니히가 알 리 없었다.

으음…….”

믿어주세요. 제 인생에 앞으로 남자는 체리드님밖에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아니면……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신가요?”

믿어달라느니 못 미덥냐느니 하는 말에 체리드니히는 테타를 빤히 쳐다봤다. 그야 못 믿는 게 당연했다. ! 혈육보다도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던 그 날의 충격이란! 잊을만하면 꿈속에서까지 나와 방아쇠를 당기던 테타 덕분에 체리드니히는 단 하루도 그 날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일이 없었더라면 테타와 결혼하지 않았을 테니 결과적으론 잘 된 일이 틀림없지만서도…….

무슨 소릴하는 거야. 테타쨩,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여태껏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테타?”

좀 지나쳤나.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신의 부름에 테타는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 어떤 대답도 않고 침실로 향했고 체리드니히는 여전히 자기 목에 칼을 겨눈 채로 혼자 덩그러니 서 있어야 했다.

사실 테타가 원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체리드니히였다. 둘의 결혼에 처음부터 테타의 의사는 없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테타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고, 자신이 청혼하지 않았더라면 테타는 분명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 영원을 약속했을 거라고 체리드니히는 생각했다. 관계 도중 끊임없이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테타였지만 그건 체리드니히가 여지껏 잠자리를 가졌던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침대 위 아니던가. 그저 말 뿐인 사랑고백에 늘 진심으로 대답하는 자신이 그렇게까지 비참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마지못해 신혼의 아내를 연기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했고 동정심이나 공포심 때문이라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 체리드니히가 그마저도 믿지 못하게 된 건 슬슬 아이를 가지는 게 어떻겠냐는 자신의 말에 아직 신혼을 만끽하고 싶다고 테타가 대답한 이후부터였다.

사람은 원래 끊임없이 욕망하는 동물이고 체리드니히는 유독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 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그가 내용물과 껍데기 중 고작 절반인 껍데기만 끌어안고 사는 것에 염증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이다. 전부 가지지 못해도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손에 넣으니 가진 것에 만족하기는커녕 있는 것마저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만 더욱 더 커져갔다. 허울뿐인 사랑은 더 이상 체리드니히에게 그 어떤 확신도 주지 못했다.

대낮부터 뜨거운 정사를 치르던 어느 날이었다. 가학적인 성벽을 가진 그는 여느 때처럼 양손으로 테타의 목을 조르며 일그러진 얼굴을 마음껏 감상하는 중이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켁켁거리는 테타를 보고 그는 절대 그럴 마음은 없지만 이대로 죽여버리면 어쩔 거냐고 테타에게 물었고 목을 졸려 대답하기 힘든 와중에도 테타는 체리드니히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최대한 정확한 발음으로 상대가 왕자님이라면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확신했다. 이대로라면 결혼생활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것을.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누워있는 테타였다. 체리드니히는 조심스레 옆자리에 누워 테타의 등을 바라봤다. 숨을 내쉴 때마다 등이 부풀었다 꺼지는 걸 보고 있자니 가슴 안쪽이 간질거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 쪽으로 몸을 돌렸을 테타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이에 체리드니히는 방법을 바꾸기로 한다.

 

 

 

고민이 있어.”

고민?”

쾅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테타를 보고 있자니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의 상관이자 그녀의 남편인 제 4왕자 때문이겠지. 테타라면 죽여버린다는 말보다는 자살하겠다는 말이 더 잘 먹힐걸요. 마지막으로 체리드니히를 만났을 때 자신이 한 말이었다. 단순히 너도 고생 한 번 해봐라 싶은 마음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정작 고생이란 고생은 테타가 죄다 하고 있으니 양심이 찔리다 못해 산산조각날 것 같았다. 너무 미안하면 말도 나오지 않는 법이라고, 사르코프는 잘못을 털어놓는 대신 잠자코 테타가 하는 말을 듣는 걸 택했다.

체리드님 때문에 요즘 죽을 것 같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들처럼 평범한 신혼생활을 보냈는데…….”

아마 나 때문일걸. 죄책감에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사르코프가 손바닥을 정장 바지에 문지를 동안 테타는 어느새 고개를 들고는 말을 이어갔다.

……처음엔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감정표현을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잖아. 그래서 맨 처음 왕자님이 자살시도를 했을 때는 솔직히……충격이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어. 내가……내가 확신을 못 줘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거든. 내가 그렇게 믿음을 못 줬나 싶어서 괴로웠지만 나도 전에 못할 짓을 했으니까……그래서 노력했어. 틈날 때마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해달라는 건 다 해줬어.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횟수가 늘었지만 그래도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어. 어쨌든 내 주의를 끈다는 건 날 사랑한다는 거잖아? 그런데 요즘은……모르겠어. 나랑 잠을 자기는커녕 매일 보란 듯이 다른 여자를 데려와선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이면 갈가리 찢어 죽이는 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원래 그런 사람이긴 했지만 나랑 관계를 아예 안 한다는 건……어쩌면 이제 나한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테타에게 대체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사르코프는 고민에 빠졌다. 끽해야 시트콤 수준의 해프닝을 상상했는데 일이 이렇게 커져버릴 줄은! 원래도 정신건강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 테타였기에 이런 나날이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면 무슨 극단적인 선택을 할 지 몰랐다. 자신이 원하는 건 그녀의 이혼 소식이지 부고 소식이 아니었다. 결국 어, , 같은 소리를 내며 한참 뜸을 들이던 사르코프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을 털어놓는 내내 테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경악스러운 표정만을 지을 뿐. 체리드니히 밑에서 일하면서 저지른 일들에 대해 고해성사를 할 때 얇은 벽 너머 신부가 무슨 표정을 지을까 종종 궁금했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지금의 테타와 똑같은 표정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당혹감. 이게 사람새끼가 맞긴 한가 싶은 놀라움.

, 아니 진짜로? 너 미쳤지?”

……미안.”

말을 다 끝마치자 테타는 어이가 없는지 허, 참나, , 같은 말 따위를 내뱉곤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컵에 담긴 물을 죄다 마시고도 진정이 되지 않는 듯, 컵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먹는 모습이 괜히 섬뜩해 소름이 돋았다.

……그 자식은 네가 마지못해서 결혼한 거라고 알고 있어.”

내가 마지못해 결혼했다고? 뭘 어떻게 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

아마 테타 너 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할걸. 누가 그 자식을 정말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생각하겠어. 당사자도 못 믿는 눈치던데. 이런 걸 말해봤자 화만 돋울게 뻔했다. 사르코프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테타의 눈치를 살폈다. 테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 양쪽 관자놀이를 누르더니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먼저 갈게.”

, ? 벌써? 어디 가는데?”

날 그렇게 못 믿으시겠다는데 믿게끔 만들어 드려야지.”

사르코프는 테타의 눈을 마주보고 잘 가라고 말하는 대신 시선을 피한 채 손을 흔들었다. 미안함에 차마 인사조차 나오지 않아서였다.

, 그리고-.”

문 앞까지 다가선 테타가 뭔가 할 말이 생각난 듯 빠른 걸음으로 다시 걸어왔다. 당장이라도 뺨을 올려붙일 기세다. 몸이 절로 움찔거린다.

넌 내가 연락하기 전까지 나한테 연락하지 마.”

 

 

 

굳게 닫힌 문 너머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안에 체리드니히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테타는 한참을 망설이다 형식적인 노크를 하곤 체리드니히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지독한 피비린내가 후끈한 수증기와 뒤섞인 채 테타를 반겼다. 막 작업을 끝냈는지 체리드니히의 얼굴엔 흥분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바닥엔 작은 체구의 여자가 해부용 개구리처럼 배가 갈라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욕실로 보이는 이 곳을 그는 작업실이라고 불렀다.

테타?”

널브러진 내장과 몸 이곳저곳에 새겨진 키스마크가 눈에 띄었다. 구역질 대신 위가 꼬이는 느낌이 불쾌했다. 명백한 질투다.

…….”

들어와도 된다고 한 적 없는데.”

대화 좀 할까요.”

대화? 어이가 없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반문하는 체리드니히의 모습에 테타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을 구기는 대신 핏기가 가시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매만지는 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일단 오해를 푸는 게 먼저겠지. 왕자님께서 뭔가 오해하는 게 있으신 것 같아서요. 허나 테타가 내뱉은 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왕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간에 제가 왕자님 소유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요.”

?”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체리드니히는 벙찐 얼굴로 테타를 쳐다봤다. 당황한 건 말을 내뱉은 테타도 마찬가지였다. 뭐라는 거야? 아니, 뭐라고 한 거야? 수치심에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한번 내뱉은 말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르코프한테서 다 들었습니다. 제가, 왕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원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서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그렇게 생각할 수가…….”

테타?”

, 울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울음 때문에 목이 막혀오는 와중에도 테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야 전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을 어떻게 온전히 믿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노력했습니다. 어쨌든 다 제 잘못이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

눈물 다음에는 콧물이었다. 테타는 킁, 소리를 내며 코를 훌쩍였다. 이렇게까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수치심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체리드니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실 다 알고 있었습니다. 다 알고 있었다고요.”

?”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날이었다. 테타는 대답 대신 흐릿한 시야로 체리드니히를 응시하며 아랫배를 매만졌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테타, 그건…….”

제가 정말 왕자님이랑 결혼하는 게 싫었다면 진작 자살했겠죠.”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또 다시 흘러나왔다. 눈가를 문지르는 익숙한 손길에 테타는 뒷걸음질을 치는 대신 눈을 감은 채 제자리에 얌전히 서 있었다. 뿌옇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오는 건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의 체리드니히였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동안 둘 사이엔 그 어떤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테타가 킁, 하고 코 훌쩍이는 소리만이 이따금 침묵을 깰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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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에도 질이 있다. 교대로 근무를 서는 경호원의 특성상, 그리고 왕자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위치상 테타는 제 시간에 푹 자본 적이 별로 없었다. 계승전 때문에 배에 탄 이후로는 더욱. 덕분에 남들 다 자는 시간에 푹 잘 수 있다는 건 테타에게 있어 휴가만큼 귀중해, 오늘 같은 날이 오면 보너스를 받는 것보다 괜히 더 설레게 되는 것이다. , 간만에 사람답게 자보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는 테타를 보다 못한 동료들이 왕자에겐 말해 놓을 테니 좀 쉬라며 대신 보초를 서준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봤자 왕자한테서 호출이 오면 바로 나가봐야 하지만. 에이, 아무리 왕자님이 남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라지만 설마 피곤해서 겨우 쉬고 있는 사람을 부르겠어? 욕실에서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워 막 잠에 들려던 참이었다. 휴대폰이 짧게 진동하며 여러번 우우웅- 소리를 냈다.

-테타

-

-왕자가 너 찾아

-테타, 빨리

보기만 해도 다급함이 느껴지는 문자였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 밤에 안 자고 왜 굳이 날 찾는 거야. 어깨가 뻐근하고 뒷목이 땡기는 게 모르는 척 그냥 엎어져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배째라는 식으로 무시하고 내일 한소리 듣는 걸 택했겠지만 상대는 체리드니히였다. 배째라는 식으로 나갔다가 정말 배가 째지게 될 수도 있었다. 하아아-. 테타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급하게 정장으로 갈아입고 체리드니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얼마 전에 12왕자가 살해당했잖아? 그게 너~! 무서워서 혼자서 못 자겠어.”

어쩌라고. 테타는 딱딱한 표정을 더 딱딱하게 굳히고는 뒷짐을 진 채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무섭다니. 따로 방으로 불러내길래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다른 왕자라면 납득하겠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제 4왕자였다. 누구보다 체리드니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테타였기에 그가 누구보다 열심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실제로 오늘 넨을 가르칠 때만 해도 이제야 실감이 나는 게 재밌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던가. 원래도 유독 사람을 귀찮게 하던 그였지만 테타가 넨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로 그 빈도가 부쩍 늘어난 요즘이었다. 가장 신뢰하는 부하가 자신 때문에 온갖 약을 달고 산다는 걸 왕자는 알까. 이 이상 약을 늘리는 건 사양이었다. 체리드니히 앞이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말씀하셔도……사르코프라도 부를까요.”

테타쨩은 날 사르코프한테 맡기고도 안심이 돼?! 내가 걱정도 안 돼?”

걱정 안 되냐니. 당신이 뽑았잖아. 사르코프는 대화하다 보면 가끔 답답할 때가 있어서 그렇지 절대 무능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렇게 보여도 일단 제 4왕자의 경호원이다. 약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사람을 자르던 그의 밑에서 아직까지 사지 멀쩡하게 있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유능한 지 알 수 있었다. 본인이 뽑은 경호원을 이제 와서 못 믿는 건 아닐 거고, 정말 무서워서 그러는 건 더더욱 아닐 테니 체리드니히의 목적은 아마 테타 자신이리라.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건 그와 별개의 일. 노골적으로 속을 드러내며 자신을 쳐다보는 체리드니히의 시선에 테타는 하마터면 눈을 피할 뻔했다.

……같은 방에서 자면 되는 거죠?”

너 지금 뭐라는 거냐? 미간을 찌푸린 채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게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긴장한 탓에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테타는 뒷짐을 진 채 축축한 손으로 정장 마이를 꽉 붙잡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테타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자 체리드니히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곤 자기 침대를 두드렸다.

왕자님, 그건 좀…….”

말이 많네. , 내가 지금 네 의사를 묻는 것 같아?”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게 대체 뭐하는 건지. 테타는 불을 끄곤 왕자의 옆에 누운 채 천장을 응시했다. 아득하게 높은 게 도무지 배 안이라고는 믿기지 않아, 어째서인지 괜히 숨이 막히는 게 되려 천장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체리드니히의 시선 역시 한몫했으리라. 괜히 상대해줬다간 더 귀찮아질 뿐이라는 걸 오랜 세월에 걸쳐 깨달은 테타는 체리드니히를 마주보는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테타.”

자신을 부르는 체리드니히의 목소리에 테타는 여전히 눈을 감고선 대답했다.

.”

그러고 잘 거야? 위에 마이라도 벗지 그래?”

괜찮습니다.”

아니면 내가 벗겨줄까?”

…….”

졌다. 졌어. 탁자 위의 스탠드를 켠 테타는 몸을 일으킨 후 정장 마이를 벗곤 잘 개어 탁자에 올려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체리드니히가 끈적한 손길로 테타의 등을 쓸어내렸다. 와이셔츠 위로 느껴지는 손길에 머리털이 쭈뼛 선다.

브래지어는 안 풀어?”

침착하자. 어설프게 반응하면 할수록 상황만 더 안 좋아질 뿐이야. 테타는 체리드니히에게 등을 돌리지도, 체리드니히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서지도 않은 채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연주홍빛 스탠드 조명이 야릇한 분위기를 더했다. 단추가 하나씩 풀어질 때마다 체리드니히의 시선 역시 아래로 향하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셔츠를 벗고, 브래지어 후크를 풀고, 다시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고, 벗은 브래지어를 개켜놓은 정장 위에 올려놓는 동안 테타의 얼굴에선 조금의 수치심이나 당혹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만 잘까요.”

흰색이구나. 테타답다면 테타답네.”

불 끄겠습니다.”

체리드니히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테타는 긍정으로 받아들이곤 스탠드를 껐다. 빛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어둠이 방안에 짙게 깔렸다. 바로 등을 돌리고 싶었지만 왕자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으니 관두기로 했다. 조금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기간 쌓인 피로로 막 잠에 들려던 참이었다.

테타, ?”

대답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진짜 자?”

시간이 늦었습니다. 내일도 넨 수행을 해야 하니 이만 주무세요.”

무서워서 잠이 안 와.”

아 진짜 좀! 테타는 구겨진 휴지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컴컴한 탓에 체리드니히가 테타의 실루엣만 겨우 볼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치아에 혀가 딱 달라붙어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찰까봐 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오늘도 제 시간에 자긴 글렀구나. 꿈 한번 안 꾸고,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는 건 바라지도 않았는데. 사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게 아닐까? 어둠 속에서 침대 옆 탁자를 더듬거리며 스탠드 전원 부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연주홍빛 조명이 들어와 둘을 비췄다.

동화책이라도 읽어드릴까요.”

아하하! ? 테타쨩이 직접 읽어주는 거야?”

그거 진짜 웃긴다-. 한참 키득대던 체리드니히는 눈물 닦는 시늉까지 해보이며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길 나이는 이제 지났을 텐데. 대체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농담으로 한 말이 맞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웃을 일인가. 테타로선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싫으시다면 다른…….”

아니, 아니……좋네. 어디 한번 해봐.”

농담이었는데.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기에 내심 당황한 테타는 침착하게 방 밖의 사르코프에게 연락을 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르코프는 선내의 도서관에서 가져온 동화책을 체리드니히에게 건넸다. 얇은 동화책엔 다리가 지느러미인 여자아이 그림과 함께 큼직하게 인어공주란 네글자가 박혀 있었다. 스탠드 조명만 켜진 방 안에서도 사르코프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잘 보였다. 이게 대체 뭐야? 그렇게 묻는 듯한 사르코프의 표정은 이내 탁자 위, 자신이 선물한 브래지어를 발견하곤 급격하게 어두워졌고 눈썰미 좋은 테타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미묘하게 축 처진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 밤이 지나고 어떻게 오해를 풀어야 할지 생각하자니 벌써부터 위가 꼬이는 기분이었다. 허나 그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눈앞의 왕자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진짜? 정말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안 믿기는 게 현실감이 없었다. 테타가 혼란스러워 하거나 말거나 체리드니히는 사르코프가 가져온 동화책을 이리저리 살펴보곤 테타에게 건넬 뿐이었다.

읽어.”

?”

읽으라고. 읽어준다며?”

진심이세요? 테타는 체리드니히를 한번 쳐다보더니 어느새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그의 얼굴을 보고는 마지못해 동화책을 펼쳤다.

……아주 먼 옛날 바닷속 깊은 곳에 인어공주가 살고 있었어요.”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떨리는 게 애처로웠다. 첫 문장을 읽고 잠시 말을 멈춘 테타는 체리드니히를 바라봤다. 계속 할까요. 테타의 물음에 체리드니히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걸로 대신 대답했다. 테타는 아예 체리드니히쪽으로 몸을 향한 뒤 목소리를 가다듬곤 마저 읽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음정에 체리드니히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테타의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

평생을 바닷속에서만 살아온 인어공주에겐 오랜 소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육지에 올라가보는 것이었어요. 아버지, 육지로 올라가보고 싶어요. 잠깐이라도 좋아요. 딱 한 번만요. 허나 막내딸인 인어공주를 끔찍이 사랑한 용왕은 그 소원만큼은 들어줄 수가 없었어요. 육지는 몹시 위험한 곳이었거든요. 사랑하는 내 딸 인어공주야…….”

그만, 됐어.”

무슨 문제라도?”

아니. 어떤 느낌인지 이제 알았으니까 됐다고. 잘 거니까 불이나 꺼.”

뭘 알았다는 건지, 자신도 모르게 실수하진 않았는지, 오늘따라 유독 이상하게 구는 이유는 또 뭔지 궁금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한낱 경호원인 테타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알겠습니다.”

조명을 끄자 방안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익숙해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쳤어. 테타는 조심스레 체리드니히에게 등을 돌렸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베개에 뺨이 닿는 게 기분 좋았다. 눈을 감고 막 잠에 들려던 참이었다. 체리드니히가 뒤에서 허리를 껴안았다.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사르코프의 오해가 더 이상 오해로 남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에선 경고음이 울렸다.

어때?”

, ……?”

안 불편하냐고.”

불편한 것보단 무서운 게 더 큰 테타였다. 잠이 확 달아났다. 테타는 당혹감에 뭐라 해야 할지 말을 골랐고, 체리드니히는 잠깐의 침묵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재촉하듯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됐어.”

체리드니히는 그렇게 말하곤 테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 .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는 자신의 심장과 달리 등에서 느껴지는 체리드니히의 심장박동은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테타가 겨우 숨을 가다듬었을 때 체리드니히가 입을 열었다.

테타.”

.”

이번 침묵은 체리드니히의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한참 뜸을 들이던 그가 내뱉은 말은 테타가 잔뜩 긴장한 게 우스울 만큼 별 거 아닌 것이었다.

잘 자.”

그답지 않은 심심하고 정상적인 인사에 절로 맥이 빠졌다. 오늘은 정말 유독 이상한 날이야. 자신의 허리를 껴안은 팔에 조금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지만 위협적이진 않은 밤이었다. 테타는 여전히 체리드니히에게 안긴 채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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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4  (0) 2020.01.04
Posted by 꾸웅큥

발렌타인데이라는 대목을 하루 앞두고 백화점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입구 앞에 놓인 가판대가 초콜릿을 가득 쌓아놓은 채 테타를 반겼다. 지하 1층엔 발렌타인데이라고 적힌 분홍색 간판들이 작은 하트와 함께 매장 이곳저곳에 걸려 있어 누구라도 지금이 발렌타인 시즌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직원들은 마치 이 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생글거리는 미소와 한껏 높인 목소리로 매장 앞을 지나가는 손님들을 끌어당겼고, 매대에 진열된 초콜릿이며 마카롱, 쿠키 같은 것들은 아기자기한 내용물과 귀엽고 고급스러운 포장으로 손님들의 지갑을 열기에 충분했다. 인파 속에 파묻힌 테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작은 키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을 테타에게 직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한테 선물하실 건가 봐요~ 남자친구?”

, . 남자친구랑 회사 사람들요.”

그러시구나. 지금 행사기간이라 다 20프로 할인하고 있거든요~ 남자친구분은 단 거 잘 드세요?”

사르코프? 단 걸 좋아하진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았지. 그는 까다로운 자신의 상사와는 달리 호불호가 딱히 없는 남자였다. 대충 주면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하는 테타의 말에 직원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 이게 지금 제일 잘 나가요.”

진열대 유리 위를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 아래엔 열두 개의 초콜릿들이 제각각 다른 모양을 한 채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우와 귀여워. 테타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튀어나왔다.

그쵸, 너무 귀엽죠. 포장은 이렇게 돼 있어요~.”

잘 정돈 된 손가락이 이번엔 초콜릿 뒤쪽을 가리켰다. 연한 민트색 상자에 매끈한 재질의 흰색 리본이 깔끔하게 묶인 채로 진열되어 있었다. 진짜 귀여워. 테타가 홀린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해야지.

……저건 내용물 다 똑같고 포장만 다른 건가요?”

, 상자 색깔만 다르고 안에 내용물은 똑같아요~.”

똑같은 모양, 똑같은 크기, 똑같은 흰색 리본을 단 채 색깔만 연분홍색으로 다른 포장상자가 테타의 시선을 끌었다. 귀여워. 민트색도 좋지만 역시 연인 사이엔 이런 게 더 낫겠지. 다른 날도 아니고 발렌타인데이인걸.

그럼 일단 이거랑……천천히 골라도 되나요?”

, 물론요. 천천히 고르세요~.”

사르코프 건 골랐으니 됐고, 다른 직원들은 대충 사다주면 될 거고, 그럼 이제 왕자님 것만 고르면 되나. 테타는 언젠가 체리드니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단 건 질색이야. 그런 건 계집들이나 먹는 거지. 여자들은 이상하게 그런 걸 좋아하더라?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그런 사람한테 초콜릿을 챙겨주라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갔지만 사르코프가 그런 말을 한 데엔 다 이유가 있으리라. 단 건 질색이랬으니까 웬만하면 안 단 게 낫겠지. 달지 않은 초콜릿이라니 무슨 펄 없는 밀크티도 아니고.

상사분이 단 걸 안 좋아하셔서 그러는데 그런 것도 있나요? 가격대가 좀 있는 걸로요.”

그럼요~. 여기 이건 단 맛이 적고 씁쓸한 맛이 강해서 어르신들도 잘 드세요.”

어르신들이라는 직원의 말에 테타의 입에서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긴, 왕자님이 늙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젊지도 않지. 직원이 추천한 건 고급스러운 다크브라운 색깔의 상자에 초콜릿 20개가 들어있는 제품이었다. 아까 귀여움으로 도배한 사르코프의 것과는 정 반대인 게 오해의 여지라곤 눈곱만큼도 줄 일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카카오 함량이니 카카오 버터가 어떻다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 역시 한몫했다. 제 아무리 미친 사람처럼 보여도 상대는 왕족이었다. 적당한 걸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작년에 사르코프의 말을 듣고 대충 와인을 선물했다가 얼마나 불안에 떨었던지! 발렌타인데이인데 초콜릿은 어디 갔냐며 죽은 눈으로 쳐다봤을 땐 정말이지 죽는구나 싶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날 죽은 건 테타나 사르코프가 아니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건장한 남자였고, 비겁하게도 내심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초콜릿 하나 못 받은 게 그렇게까지 미친 사람처럼 반응할 일인가? 단 건 싫다면서 초콜릿을 찾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갔지만 원래 제 4왕자는 그런 사람 아니던가.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는. 쨌든 그 미친 상사에게 직접 만든 걸 주자니 괜히 기분이 더럽고, 일류 파티셰를 부를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큼 초콜릿을 좋아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러자니 돈이 아깝고, 처음부터 가격대가 있는 걸 선물하는 게 그나마 가장 쉽고 확실한 선택지였다.

이걸로 할게요. 그리고 저기 초콜릿 9개 들은 것도 열 개 주세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카드를 건네받은 직원의 입꼬리가 비실비실 올라갔다. 금방이라도 콧노래를 부를 것처럼 들뜬 표정이었다.

할부는 몇 개월로 해드릴까요?”

일시불로 해주세요.”

, 잠시만요~.”

고르는 건 한참 걸렸는데 결제는 순식간이었다. 카드 단말기는 카드를 꽂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영수증을 토해냈다. 직원은 영수증을 끊은 뒤, 숙련된 솜씨로 쇼핑백 안에 초콜릿을 담아 테타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뒤돌아서 영수증을 살핀 테타의 미간에 주름이 얕게 새겨졌다. 솔직히 다른 직원들이나 사르코프 건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직장 동료고, 애인이니. 허나 체리드니히의 몫은 당장 뒤돌아서 다시 환불해버리고 싶을 만큼 아까웠다.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어차피 테타는 지금도 충분히 차고 넘치게 벌고 있었기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좋아하지도 않는 걸 선물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작년과 달리 왜 굳이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사람한테 돈까지 써가며 초콜릿을 선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저기요!”

우선-

, 손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작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뇨, 파베 초콜릿도 하나 계산해주세요.”

 

초콜릿은 충분히 산 거 같으니 작년의 이야기를 해보자.

 

 

 

단 건 질색이야. 그런 건 계집들이나 먹는 거지. 여자들은 이상하게 그런 걸 좋아하더라?”

그러시군요…….”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왕자에게 초콜릿을 좋아하냐 물었을 뿐이었다. 그의 성격상 좋아한다는 대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지만 설마 저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예상한 것도 아니어서, 테타는 궁금하지도 않은 그의 여성관이 어떤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계집들이나 먹는 거라니. 참 한결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물어본 내 잘못이지.

테타쨩은 단 거 좋아해?”

? , 싫어하진 않습니다.”

흐응-.”

테타쨩도 여자라 이거지. 그렇게 덧붙인 체리드니히의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냥 안 좋아한다고 말했어야 했나. 후회가 물밀 듯 몰려왔다. 그가 싫어하는 여자 안에 단 걸 좋아하는 여자도 들어갈 것 같았기에. 아니, 성격 상 반드시 들어가겠지. 사르코프랑 결혼하기로 약속했는데 식도 못 올려보고 벌써 죽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

별거 아닙니다.”

에이,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 이 인간의 집요함은 정말 알아줘야 한다. 며칠 후면 발렌타인데이라서, 일단 직장 상사니까, 그냥 넘어가기도 뭐해서 예의상 물어본 것뿐이다. 허나 그것도 괜한 짓이었다. 상대는 여성관이 현대랑은 한참 뒤떨어진 제 4왕자로 그 정도가 현 국왕인 나스비 보다도 심한 자가 아니던가. 멋대로 쓸데없는 의미부여를 하는 건 정말 사양이다.

정말 별거 아니니까요. 신경 쓰이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뭐야, 사람 궁금하게. 설마 나한테 관심 있어?”

거 봐. 괜한 짓이라니까. 관심이라니. 이미 사랑하는 사람과 미래를 약속한 테타가 관심을 가질만한 상대는 사르코프 말고 전무했다.

? 그게 무슨……아뇨, 그럴 리가요. 별다른 일 없으면 이만 퇴근해도 괜찮을까요.”

체리드니히는 테타를 쳐다보지도 않고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손을 흔들었다.

……그래, 알았어. 퇴근해~.”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아 참, 테타쨩.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뒤 막 방을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체리드니히의 부름에 테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금방 표정을 바꿔 체리드니히 쪽으로 다시 뒤돌아섰다. 표정변화가 빠른 게, 테타가 경호원이 아닌 배우를 하고 있었다면 아마 올해의 여우주연상은 따 놓은 당상이었으리라.

난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테타쨩이 주는 거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 .”

방금 전까지 질색이라고 했으면서 뭐 어쩌라는 건지. 설마 체리드니히가 자신에게 마음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테타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이는 훗날 테타가 당뇨에 걸리기 직전까지 초콜릿을 먹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 고마워. 뭐 이런 걸 다 준비했어. 땡큐-. 헤엑, 너무 비싼 거 아냐? 이렇게 받으면 다음 달에 난 뭐 해주냐~. 잘 먹을게. 안 줘도 괜찮은데. 발렌타인데이 당일. 출근과 동시에 초콜릿을 돌리면서 테타가 들은 말들이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 선물한 보람이 있는 반응들뿐이어서 테타는 묘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맛에 돈 벌지. 양손 가득했던 쇼핑백은 어느새 하나 빼고 다 제 주인을 찾아간 지 오래였다. 제일 비싼 초콜릿을 건네준 사르코프에겐 일 끝나고 저녁에 보자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보자니! 사르코프의 말 한마디에 온몸이 근질거림과 동시에 퇴근까지 아직 한참 더 남았다는 사실이 테타를 절망 속으로 빠트렸다. 퇴근. 퇴근을 하려면 상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상사의 허락을 받으려면 좋든 싫든 얼굴을 봐야 한다. 매일 보는 사람이지만 오늘처럼 뭘 선물해야 하는 날은 특히나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직장동료 중 한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 선물했다는 이유로 재떨이로 머리가 터지도록 얻어맞았던 걸 기억한다. 하아-. 테타는 손가락 끝에 걸쳐진 쇼핑백을 빙글빙글 돌리더니 이내 꽉 붙잡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방에 들어서자 체리드니히가 소파에 누워있는 채로 테타를 반겼다. 다행히 나른하고 기분 좋아 보이는 게 수틀렸다고 대가리를 깰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괜찮아. 무슨 소리가 나면 사르코프가 알아서 구급차를 부르던가 하겠지. 쇼핑백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다른 게 아니고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라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만 마음에-.”

, 테타쨩이? 나한테? 정말? 생각도 못 했어! 잘 받을게~.”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다고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을 일으켜 쇼핑백을 낚아챈 체리드니히의 반응은 솔직히 좀 과할 정도였다. 아침부터 약이라도 해서 맛이 간 거 아냐? 테타가 말없이 공포에 떨고 있을 동안 체리드니히는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대에 찬 얼굴로 쇼핑백 양면에 붙은 테이프를 뜯었다. 쇼핑백 안에서 포장된 선물을 꺼내고, 포장을 뜯기 전 이리저리 살펴보고, 포장을 하나하나 벗기고 상자 안에서 와인을 꺼내는 동안 체리드니히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장관이었다. 테타 본인이 선물한 것만 아니었으면 아마 이 광경으로 일주일은 웃으며 잠들 수 있었으리라. 허나 안타깝게도 체리드니히를 저런 표정으로 만든 건 다름아닌 테타 자신이었다. 아직 얻어맞지도 않은 뒤통수가 벌써 욱신거리는 듯했다.

, 평소에 술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오늘 발렌타인데이 아냐? 초콜릿은?”

우와, 눈이 죽어 있어. 아직 추운 날씨인데도 목 뒤로 땀이 줄줄 흘렀다. 테타의 시선이 체리드니히 뒤에 있는 인체의 신비 전시회에나 나올 법한 컬렉션 쪽으로 향했다. 대답을 잘못 했다간 단순히 뒤통수가 터지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르코프와 데이트는커녕 죽어버린 애틋한 첫사랑으로 그에게 기억될 수도 있었다. 신중히 대답해야 한다. 그렇지만 뭐라고 해야 해? 단 건 질색이라는 사람이 초콜릿은 대체 왜 찾냐고!

, 미쳤냐? 대답 안 하냐?”

, , 단 건 계집들이나 먹는 거라고 싫어하셔서…….”

얻어맞는다. 이제 뒤지게 얻어맞고 장기가 다 끄집어진 채 엠버밍 된 후, 박제되어 컬렉션에 추가될 것이다. 작품명은 언해피 발렌타인쯤 되려나. 곧 다가올 폭력에 눈을 질끈 감은 테타는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의아함에 다시 눈을 떴고, 눈앞엔 되려 자기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의 체리드니히가 자신을 쳐다볼 뿐이었다.

……, 하하!”

왕자님?”

약을 너무 해서 미친 건가. 아침부터 공복에 약이랑 술을 같이 해서 대가리가 돌아버린 거지. 테타의 생각대로 체리드니히는 정말 돌아버린 건지 혼자 한참을 하하하 웃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게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그래……그랬었지……. 나 오늘 나갔다 올 테니까 찾지 말고 시간 되면 알아서 퇴근해.”

그렇게 말하던 체리드니히는 꼭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경호원한테 나갔다 올 테니 찾지 말라는 게 대체 무슨 헛소리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테타는 일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에 의의를 둬야 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죽는 줄 알았어. 무슨 일이냐며 뛰어온 사르코프에게 이 한 마디 말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짜,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아삭아삭. 오물오물. 냠냠염염. 테타는 오늘 하루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전부 먹는 걸로 풀 생각인 듯했다. 뺨을 불룩거리며 끊임없이 먹어대는 모습이 꼭 겨울잠 준비를 하는 햄스터 같았다. 테타는 스테이크를 다 먹어치우고 나서도 부족한지 텅 빈 샐러드볼을 포크로 한참 뒤적거렸고, 이를 보다 못한 사르코프가 제 몫의 스테이크를 반 잘라 양보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나이프를 쥐곤 칼질을 시작했다.

맛있어?”

자신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테타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 뭐가 웃긴데. 그렇게 묻는 듯한 테타의 표정에 사르코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남은 스테이크 절반을 전부 테타의 접시 위에 덜어줬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고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연인의 모습은 정말 언제 봐도 짜릿한 게 질리지가 않았다. 4왕자는 테타의 이런 모습을 감히 상상이나 해봤을까. 다른 직원들 손에 들린 초콜릿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세상 다 잃은 표정을 짓던 게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요즘 들어 유독 테타에게 치근덕거리던 체리드니히 때문에 내심 고민이 많았던 사르코프는 덕분에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한 번에 풀 수 있었다. 물론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의 쇼핑백을 쳐다보던 체리드니히를 떠올리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지만.

테타의 잔이 비자 웨이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잔을 채웠다. 왕자님한테 뭘 선물해야 할지 모르겠어. 단 건 질색이라고 했단 말이야. 괜히 마음에 들지도 않는 거 선물했다가 수틀리면 어떡해? 그렇다고 왕자님만 안 줄 수도 없고. 발렌타인데이를 며칠 앞두고 테타가 침대 위에서 했던 말들이었다. 그냥 적당히 아무거나 선물해도 될 거 같은데. 자신의 대답에 그 사람이 너처럼 대충대충 넘어갈 것 같냐며 짜증내던 테타가 품에 안긴 채 웅얼거리며 한 말을 기억한다.

-……난 너랑 결혼도 못 해보고 죽는 건 싫어.

나도 마찬가지야.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몸이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눈이 맞자 다시 한 번 정사를 치룬 밤이었다. 가시지 않은 쾌감에 멍한 눈으로 숨을 고르던 테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마음껏 즐기다 무심코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와인은 어때? 그 인간 술 좋아하지 않았어?

그거 괜찮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술병으로 얻어맞지 않게 빌어줘. 테타의 말에 끔찍한 소리하지 말라며 목덜미에 코를 파묻곤 그대로 잠이 들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있겠나 싶었는데. 넌 너무 적당히 해서 문제야. 잊을만하면 하던 테타의 잔소리 중 하나였다. 결론적으로 테타가 옳았다. 사르코프는 사냥감을 찾으러 나가던 체리드니히의 뱀처럼 서늘한 눈을 떠올렸다. 아마 왕자의 기분이 조금만 더 나빴더라면 오늘의 희생양은 내가 됐겠지. 사르코프 역시 테타와 결혼도 못 해보고 그의 컬렉션으로 남는 건 사양이었다.

테타.”

?”

이제 슬슬 배가 부른지 칼질을 그만둔 테타가 왜 부르냐며 사르코프를 쳐다봤다. 테타는 매사에 똑 부러지며 눈치가 빠르면서도 의외로 이런 쪽으론 둔한 면이 있었다. 올해는 어떻게 잘 넘어갔지만 그 인간 성격상 내년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둘 다 살아서 결혼하려면 확실히 알려두는 편이 좋았다.

내년부턴 그 자식 초콜릿도 챙겨줘.”

하아아-.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엎어진 테타를 웨이터가 힐끗거리던 게 벌써 작년의 일이다. 자기 몫의 초콜릿까지 산 테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휴대폰 화면을 보니 벌써 아홉시가 다 돼 갔다. 그 사람에게 초콜릿이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겠어. 역시 와인도 같이 사는 게 나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잘못하면 누구 놀리냐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에 관두기로 했다.

기숙사로 돌아온 테타는 현관 앞에 쇼핑백을 놔둔 후 침대에 엎드렸다. 꼭 건장한 성인 남성 여럿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피곤했다. 체리드니히의 호출로 인해 지난 한달 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해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테타였다. 바쁜 건 이제 끝났으니까 이번 주엔 쉴 수 있겠지. 내일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이 소소하게나마 위안이 되었다. 조금만, 조금만 누워 있다가 씻어야지. 마음 같아선 그냥 이대로 자고 싶었지만 당장 내일도 출근이었다. 침대 위에서 한참을 미적거리던 테타는 휴대폰을 보곤 마지못해 욕실로 향했다.

 

 

 

땡큐~. 역시 테타밖에 없어. 안 챙겨줘도 되는데. 고마워, 다음 달에 제대로 돌려줄테니까 기대해! 이번에도 돈 좀 썼겠다. 잘 먹을게. 작년과 비슷비슷한 대답에 테타는 데자뷰를 느꼈다. 다른 게 있다면 올해는 체리드니히 몫의 초콜릿도 있다는 것과 사르코프의 초콜릿에 좀 더 힘을 줬다는 점이었다.

테타 네가 직접 고른 거야?”

쇼핑백 안을 내려다보며 사르코프가 감탄을 내뱉었다. 파스텔 톤의 연분홍색 상자는 누가 봐도 둘이 연인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디자인이었다. 평소 짜증내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건 또 확실히 챙겨주는 게 테타답다면 테타다웠다. 체리드니히가 보게 되면 작년보다 더 미쳐 날뛸 거라는 게 불안하긴 했지만. 사르코프는 테이프가 붙여진 쇼핑백 안이 보이지 않도록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테타, 그 자……아니, 왕자 몫은 챙겼어?”

테타는 하나 남은 쇼핑백을 쥐곤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의 일을 떠올리자니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같이 문 앞까지 가줄까? 사르코프의 물음에 테타는 고개를 젓고선 사르코프의 손을 붙잡았다. 뭐 깨지는 소리 들리면 바로 사람 불러줘야 해.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쉬고 체리드니히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좋은 아침~.”

익숙한 목소리에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테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붙잡았던 사르코프의 손을 빠르게 놓고는 표정을 굳혔다. 사르코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야, 저 사람이 왜 저기서 나와.

좋은 아침입니다!”

왕자님, 좋은 아침입니다!”

초콜릿을 건네받은 직장동료들이 쇼핑백을 손에 꽉 쥔 채 허리를 숙였다. 정장 입은 남자들이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풍경이 왕자님보단 보스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왕자님, 어디 다녀오실 거였으면 저한테 연락하시지 않고…….”

? 아니, 별 거 아냐. 눈이 일찍 떠져서 잠깐 산책한 것뿐이야. 아침부터 이런 걸로 부르기도 좀 그렇잖아?”

그런데 손에 그건 뭐야? 눈을 빛내며 묻는 체리드니히의 말에 테타는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는 쇼핑백을 내밀었다.

발렌타인데이라서 초콜릿을 준비했습니다. 최대한 달지 않은 걸로 골랐는데 마음에 드셨으면-.”

초콜릿? 테타가 웬일이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다고요. 체리드니히는 테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테타가 쥔 쇼핑백을 낚아챘다. 어째 작년이랑 비슷한 게 벌써부터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테타가 불안에 떨거나 말거나 체리드니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쇼핑백에 붙은 테이프를 뜯곤 내용물을 꺼낼 뿐이었다. 누가 봐도 초콜릿 포장으로 보이는 다크브라운 색깔의 상자가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냈다. 상자를 흔드니 안에 든 초콜릿이 부딪혀 달각 달각 소리가 새어나왔다. 체리드니히의 눈이 가늘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요리를 내놨는데 맛도 안 보고 플레이팅 먼저 심사받는 기분이었다. 마음에 안 드나? 숨이 가빠왔다.

단 건 별로긴 한데 테타쨩이 준 성의가 있으니까 받아줄게.”

감사합니다.”

내 돈 주고 선물하면서 감사하단 말까지 해야 하다니. 사회생활이 힘든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거지같을 줄이야. 그래도 상상했던 것처럼 나쁜 반응은 아니어서 테타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만 무사히 넘기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걱정 없이 이틀은 쉴 수 있다.

테타쨩, 오늘 일 끝나고 저녁에…….”

?”

저녁에 시간 되냐고 말하려던 체리드니히는 곧 입을 다물었다. 사르코프는 자신의 쇼핑백에 꽂힌 체리드니히의 시선을 알아채곤 손잡이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실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늦은 일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내용물이 보일 리 없을 텐데 제 4왕자는 쓸데없이 눈도 좋았다.

아냐, 됐어……뭐 해? 다들 일 안 해? 테타, 내가 시킨 건 어떻게 됐어? 이번 주 주말에도 나오기 싫으면 빨리 끝내.”

, 오늘 중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체리드니히는 테타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리곤 성큼성큼 방으로 향하곤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잘못한 게 있나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 그래 일이나 하자. 고민해봤자 테타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일밖에 없었다.

역시 테타쨩~. 오늘 안에 끝낼 줄은 몰랐는데. 수고했어~. 이건 뭐 미친 지킬앤하이드도 아니고. 체리드니히는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화가 풀리다 못해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쯤 되면 조울증으로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냐? 테타는 왕자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유하는 대신 과찬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뭐가 됐든 왕자의 기분이 풀린 건 테타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었다.

그동안 주말에도 출근하느라 고생 많았지? 이번 주말엔 안 나와도 돼. 이만 퇴근해서 푹 쉬어~.”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평소의 체리드니히를 생각하면 지나칠 정도의 친절이었다. 테타는 조만간 왕자가 정신과 상담을 받을 거라 확신했다. 아니면 이미 받고 있거나. 체리드니히 뒤에 걸린 벽시계가 여섯 시를 가리켰다. 사르코프와의 저녁약속이 일곱 시니까 아직 한참 여유가 있는 셈이지만 눈앞에 있는 상대는 조울증을 앓고 있는 체리드니히였다. 괜히 책잡히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테타는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뒤돌아섰다. 방이 넓다고는 하지만 문까지 새삼 멀게 느껴졌다.

아참, 테타쨩.”

?”

뭐야. 뭔데. 괜찮아.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어. 긴장한 탓에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초콜릿 잘 먹었어. 받기만 하긴 그래서 나도 초콜릿을 준비했는데 받아줄 거지?”

뭐야. 진짜 왜 저래. 테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체리드니히가 건넨 상자를 받아들었다. 새까만 상자에 달린 피처럼 붉은 리본이 괜히 섬뜩했다.

보답을 바라고 한 건 아닌데……감사합니다.”

빨리 나가자.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한 후 걸음을 옮기려던 그 때였다.

뭐 급한 일이라도 있나봐? 누구랑 약속이라도 있어?”

급한 일도, 약속도 있지만 사내연애중이라 데이트하러 간다고 말했다간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아뇨, 없습니다.”

그래? 잘됐네. 급한 일 없으면 좀 먹고 가. 모처럼 준비한 건데 테타쨩이 먹는 걸 보고 싶어서 말야.”

…….”

망설여봤자 사르코프와의 저녁약속이 늦어질 뿐이다. 자기 옆자리를 가리키며 이쪽에 앉으라는 체리드니히의 말에 테타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참고는 자리에 앉았다. 손가락에 닿은 리본의 감촉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떨리는 손으로 리본을 잡아당기자 큼직하게 부푼 리본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체리드니히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테타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상자를 열자 스무개의 초콜릿들이 테타를 반겼다. 저마다 다른 색으로 알록달록, 반짝거리는 게 척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게 시중에 파는 것 같진 않았다. 체리드니히가 만들진 않았을 거고 사람을 고용해서 만든 듯했다. 한참을 홀린 듯 바라보는 테타를 체리드니히가 재촉했다.

안 먹고 뭐 해? 먹여줄까?”

? , 아뇨, 그게, 너무 예뻐서…….”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테타가 초콜릿을 노려봤다. 체리드니히가 만들진 않았다고 해서 내용물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면도칼이나 바늘, 아니면 독 같은 게 들어있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테타는 금으로 장식된 초콜릿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곤 혀로 누르며 살살 녹였다. 깨물면 입안이 베이거나 찔릴 것 같아서였다. 초콜릿이 녹으면서 이물감이 느껴지는 대신 황홀한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입천장이 녹아내릴 것처럼 달면서도 씁쓸한 맛이 나는 게 일품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랜덤인가?

맛있어?”

……맛있네요.”

다행이네. 테타쨩만을 위해서 준비한 거니까 많이 먹어.”

자신을 위해서 준비했다는 체리드니히의 말에 오늘 아침식사까지 죄다 게워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의 테타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끄덕이며 초콜릿을 먹는 일밖에 없었다. 초콜릿 한 개를 무사히 먹은 테타는 이번엔 붉은색의 하트모양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입안에 넣고 조심스레 깨물자 진한 체리향이 확 풍김과 동시에 초콜릿 안에서 뭔가가 터져 나온다. 술이다. 도수가 높은지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술이 들어간 건 많이 먹어봤지만 테타가 살면서 먹어본 것 중에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었다. 나중에 반응이 올지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이번에도 이상한 건 들어있지 않는 것 같았다.

테타는 이어서 화이트 초콜릿, 아몬드가 박힌 초콜릿, 분홍색의 장미모양 초콜릿 등 남은 초콜릿들을 입안에 넣어봤지만 뭐 하나 이상한 거 없이 뛰어난 맛을 자랑했다. , 진짜 맛있어. 어느새 20개 중 절반 이상을 먹어치운 테타였다. 맛있는 것과는 별개로 이제 입안이 달다 못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지나친 단맛에 속이 울렁거렸다. 슬쩍 시계를 흘겨보니 어느새 여섯 시 이십분이 조금 넘어 있었다. 고작해야 초콜릿 먹는 데에 저만큼이나 시간을 허비했다고? 아무리 왕자님 앞이라 신경 쓰며 먹었다고 해도……. 마음 같아선 한 번에 여러 개를 집어 입안에 쑤셔 넣고 싶었지만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체리드니히 때문에 불가능했다. 테타의 손이 다시 초콜릿 쪽으로 향했다.

다 먹었다……! 속이 미식거리는 게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분 늦는 정도야 사르코프도 이해해 주겠지.

왕자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이제 곧 저녁시간인데 왕자님도 시장하실 테니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왕자님?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테타에게 체리드니히는 빈 초콜릿 상자를 가리켰다.

뭐하는 거야. 다 먹고 가야지.”

그게, 그게 무슨 소리세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테타를 본 체리드니히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체리드니히가 친절히 빈 초콜릿 상자를 들어보였다. 상자를 치운 곳엔 초콜릿 20개가 담겨 있었다. 이게 대체 뭐지. 꿈인가. 테타는 자신도 모르게 볼을 꼬집을 뻔했다.

작년에 주는 걸 깜빡해서 2단으로 준비했어. 뭘 멍하니 보고만 있어? 어서 앉아. 테타쨩을 위해 준비한 거니까 마저 먹어야지.”

, 이제 저녁시간이고, 왕자님도 식사를…….”

. 그러네. 제 시간에 저녁 먹으려면 테타쨩이 빨리 먹어야겠네.”

머리가 멍했다. 누군가한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니. 얻어맞은 것 같은 게 아니라 얻어맞은 거지. 4왕자에게 얻어맞은 뒤통수가 급격하게 당기기 시작했다.

뭐해? 안 먹어? 나 배고프거든?”

……잘 먹겠습니다.”

 

누구도 죽지 않은, 평화로운 발렌타인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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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꾸웅큥

제가 쓰는 2차 창작 글에선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 원치 않은 결혼, 폭언, 폭력, 생명경시, 자살 및 자살사고, 가스라이팅 등 비윤리적 요소※가 자주 등장하며, 열람 후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일절 책임지지 않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가로운 대낮, 체리드니히는 테타의 무릎을 베고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떠도 테타가 자신에게 무릎을 내어준 채 그 자리에 있다.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지자 테타는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금세 표정을 풀었다. 꿈이 아니야. , 누군가를 산 채로 온전히 소유한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은! 손가락을 움직이자 말랑한 뺨의 감촉이 손끝으로 느껴지는 게 기분 좋았다. 참으로 기나긴 여정이었다. 어르고, 달래고, 윽박지르고, 되도 않는 협박도 해보고, 차라리 죽여 달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머리채를 쥐어 잡고, 따귀를 때리고, 배를 걷어차고, 싫다는 걸 억지로 범하고……. 오랜 노력 끝에 테타의 입에서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 날의 성취감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어,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체리드니히의 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사랑해.

왕자님……. 체리드니히의 이런 모습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테타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는 제 무릎을 벤 남자를 빤히 내려다봤고, 체리드니히는 시선을 피하는 대신 기대에 찬 눈으로 테타를 바라봤다. 꾹 닫힌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였다. 여태까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면 테타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어서. 그는 말로 재촉하는 대신 뺨 위에 얹은 엄지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이쯤 하죠. 소꿉놀이는 이제 끝났습니다.

?

 

 

 

-……자님. 왕자님. 왕자님!

왕자님, 괜찮으세요?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눈을 뜨자마자 바로 보이는 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는 테타였다. 꿈이구나. 눈가에 고인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귀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체리드니히는 손을 뻗어 테타의 뺨을 꼬집었다. 왕자님? 영문도 모른 채 뺨을 꼬집힌 테타가 자신을 부르자 체리드니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다시 표정을 풀었다.

언제까지 왕자님이라고 부를 거야?”

전부터 꾸준히 이름으로 불러달라던 체리드니히의 요구를 그냥 넘기던 테타는 또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말을 골랐다. 이제 포기한 줄 알았는데. 테타의 생각보다 체리드니히는 훨씬 더 집요하고 포기를 모르는 인간이었다. 이런 사람인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테타쨩~? 테타의 꾹 닫힌 입술을 보다 못한 체리드니히가 대답을 재촉했다. 방금 전 꿈에서 본 모습과 비슷한 게 괜히 초조해서였다.

, 그게……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흐응…….”

알았어. 이 이상 재촉하지 않을게. 뭐어, 죽기 전엔 들을 수 있겠지. 비록 오늘이 결혼식 당일이지만!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리는 체리드니히의 말에 테타는 죄송합니다, 한 마디를 내뱉고는 체리드니히의 손바닥을 잡고 가볍게 뺨을 부볐다.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개가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 같아 등허리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지금 몇 시야?”

일곱 시 반 조금 지났네요.”

그럼 아직 여유 있네? 체리드니히는 테타에게 잡힌 손을 빼내어 다시 테타의 손을 잡곤 자신의 하반신으로 끌었다. 아침이라서 일어난 생리현상이라기엔 지나치게 부푼 성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체리드니히와 눈이 마주치자 테타는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곤 떨리는 손으로 잠옷 단추를 풀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정신없는 하루였다. 아침 정사를 마치고 커피 한 잔으로 급하게 식사를 때운 후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라고 해도 가만히 있기만 하면 고용인들이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부터 머리세팅과 메이크업까지 알아서 해주니, 테타가 할 일은 얌전히 인형처럼 있는 것뿐이었지만. 고용인들에게 멍하니 제 몸을 맡기고 있는 동안 빈속에 커피를 들이부어서인지 오늘이 결혼식이어서인지 속이 쓰렸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테타는 체리드니히와 함께 차량 뒷자석에 앉아 목적지로 향했다. 답답한 마음에 차창 밖을 둘러보려 해도 보이는 건 앞, , 그리고 양옆을 가로막은 경호차량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경호차량들은 그 수가 지나치게 많아, 목적이 경호가 아니라 테타의 도주를 막기 위해서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 후, 테타는 먼저 내린 체리드니히의 손을 붙잡고 차에서 내렸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눈이 빠질 것 같았지만 경사스러운 날에 얼굴을 찌푸릴 수도 없어, 테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체리드니히는 그렇게 말하며 테타의 뺨에 입을 맞추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굽 높은 하이힐에 몸이 휘청거리자 도착해 있던 들러리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테타를 붙잡았다. 웨딩드레스는 누군가의 도움 없인 혼자 걸을 수도 없을 만큼 길어서, 뒤에서 들러리들이 웨딩드레스 끝자락을 들어줘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천국의 계단도 아니고 계단은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게 등산을 하는 건지 결혼식을 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예배당 안은 누구나 한 번쯤은 TV에서 본 적 있는 이들로 가득했다. 테타가 들러리들의 도움을 받으며 장소에 겨우 도착했을 때, 체리드니히는 찾아온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체리드니히와 하객들 위로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알록달록하게 쏟아져 내렸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 완전히 밀진 않았지만 잘 정리된 수염, 몸에 딱 맞아 떨어지는 턱시도. 종종 보던 모습인데도 어쩐지 눈이 떼지지 않아 테타는 홀린 듯 한참을 바라봤고, 자신을 부르는 체리드니히의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형식적인 혼인서약과 성혼선언 후, 반지교환이 이루어졌다. 체리드니히에게 왼손을 붙잡힌 채 약지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지는 감각이 괜히 소름끼쳐 테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테타의 차례였다. 테타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걸 참으며 체리드니히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와 슬쩍 시선을 돌리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대부분의 이들이 축하했지만 체리드니히의 본성을 아는 몇몇은 박수 대신 고개를 저었고, 축복을 비는 대신 혀를 차며 테타를 동정했다. 체리드니히와 유독 사이가 나쁜 제 1왕자마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으니 이만하면 말 다 했다.

배부른 상태로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볼 수 없는 건 좀 아쉽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날짜를 늦게 잡을 걸 그랬어. , 물론 지금도 충분히 예뻐. 주교가 주례를 하는 동안 체리드니히는 테타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계속 속삭여댔다. 왕자님, 조용히. 테타의 말에 체리드니히가 키득대며 입을 다물었다.

길고 길었던 결혼식이 끝났다. 드디어 예배당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마차에 타서 근방을 또 한바퀴 돌아야 하지만 그래도 밖으로 나오는 게 어디야. 테타는 체리드니히의 손에 의지하며 계단을 내려가고, 또 다시 체리드니히의 도움을 받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예배당을 한참 떠난 후에도 만백성이 둘의 앞날을 축하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뭐래도 정말 완벽한 날이었다.

테타, 정말 사랑해. 내가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사랑해. 평생. 행복하게. 평생. 평생. 사랑해. 행복하게 해줄게. 평생. 영원히……?

 

 

 

무드고 뭐고 지칠 대로 지친 테타는 침대에 엎드린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정말 너무 피곤하다. 죽을 것 같아. 온몸이 뻐근하고 쑤시는 게 꼭 누군가한테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이대로 뒀다간 신혼 첫날밤에 얌전히 잠만 자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체리드니히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테타를 흔들었다.

테타쨩, 아직 뻗으면 안 돼~ 신혼 첫날밤이란 말야. 욕실에 선물도 준비해뒀으니까 빨리 씻고 나와~”

왕자님, 저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조금만 자면…….”

그럼 테타쨩 자고 있을 때 해도 돼?”

……씻고 오겠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걸 알기에 테타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자고 있을 때 해도 되냐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왕자님이랑 나,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정상은 아니야. 비척거리며 겨우 욕실 앞에 선 테타는 체리드니히의 말을 떠올렸다. 선물? 뭘 준비했다는 걸까. 혹시 이혼서류?!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원래 인간은 헛된 기대를 하는 생물 아니던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욕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피비린내와 입욕제 향이 뒤섞인 채 테타를 반겼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토할 것 같은 걸 꾹 참으며 테타는 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살폈고, 금방 냄새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 , , ……! 이게, 이게 대체, 왕자님, 이건……?”

붉은 색의 피로 가득 찬 욕조엔 흰 장미꽃잎이 둥둥 떠다녔다. 눈앞의 풍경에 테타는 말까지 더듬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게 틀림없어. 관자놀이 쪽이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처녀의 피가 미용에 좋다고들 하잖아. 내가 이거 준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때, 마음에 들어? 어라? 테타쨩, 왜 그런 표정이야?”

수면 위에 비친 테타 뒤에는 어느새 체리드니히가 서 있었다. 팔뚝엔 닭살이 돋고 등엔 신경이 몰려 칼에 찔린 것처럼 아렸다. 공포심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한두번 있는 일도 아닌데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 아뇨. 그게, 너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라……무척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아예 같이 씻을까? 내가 씻겨줄게.”

혼자서 할 수 있으니까 체리드님은 좀 쉬고 계세요……!”

테타는 대체 왜 이러냐고 우는 대신 한껏 새침하게 꾸민 목소리를 내고, 거칠게 문을 닫으며 신혼 첫날밤의 신부를 연기했다. 다 들리게끔 욕실 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으우…….”

다리에 힘이 풀려 문에 기댄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테타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혹여 문 밖으로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소리죽여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테타는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욕조로 향했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아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간은 지나있었다. 첫날밤이라는 걸 감안해도 너무 오래 걸리는데. 그러고 보니 테타쨩 피곤해 보였지. 욕조에서 그대로 잠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체리드니히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잠겨 있었지만 조금 힘을 주자 손쉽게 열렸다.

테타?”

체리드니히의 예상대로 테타는 미동도 않고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테타쨩, 일어나야지. 깨우기 위해 몇 번이나 붙잡고 흔들어봤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손에 닿은 테타의 피부가 시체처럼 차가웠다. 테타, 테타, 테타! . . . 심장이 거세게 뛰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떨리는 손으로 테타의 양팔을 붙잡고 일으키는데 지나치게 가벼웠다. 한쪽 손목에 칼로 그은 듯한 자국이 얼핏 보였다. 차마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 허나 확인해야 했다. 왕자님이랑 결혼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아무리 이러셔도 제가 왕자님을 사랑하는 날은 오지 않는 걸요. 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따로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왕자님을 만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요. 전부 언젠가 테타가 자신에게 한 말들이었다. 체리드니히의 웃음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졌다.

 

 

 

욕실 안, 누구 것인지 모를 지독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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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쓰는 2차 창작 글에선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 원치 않은 결혼, 폭언, 폭력, 생명경시, 자살 및 자살사고, 가스라이팅 등 비윤리적 요소※가 자주 등장하며, 열람 후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일절 책임지지 않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은 후에도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분명 머리부터 발끝까지 뭐 하나 빠짐없이 맞춤 제작되어 몸에 걸쳐졌을 텐데. 꼭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모든게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형식적인 질문에 테타는 체리드니히를 바라봤다. 맹세합니다. 그는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테타의 눈을 마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숨이 턱 하고 막혀오는 듯했다. 맹세합니다. 테타의 입에서 자신과 같은 말이 나오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체리드니히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이 상황에서 다른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테타는 혹여나 깰까 조심스런 손길로 체리드니히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기억상실증이라고 했다. 정말 한 치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통 이렇게까지? 미간을 짚은 테타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않냐는 체리드니히의 성화에 못 이겨 요트를 탔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남들이 그러하듯 준비해둔 와인을 꺼내 마시며 서로 사랑을 속삭였다. 술기운이 오르고 당연히 손을 댈 거라 생각했던 테타의 예상과 달리 체리드니히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요트 앞머리로 향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취했던 탓인지 그대로 바다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다행히 바로 구조대원이 투입되어 눈에 크게 띄는 외상은 없어 안심했는데 기억상실증이라니! 기억이 돌아오는 건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나 듣던 대사를 실제로 듣게 될 줄은 몰랐던 테타였다.

기억상실증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골 때린다였다. 결혼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사고가 나도 이런 대형사고가 나는지. 테타는 그의 옆에만 있으면 세상 골 때리는 일은 전부 일어나는 것 같다고 결혼 전부터 사르코프에게 자주 투정을 부리곤 했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니. 정말 그러면 어떡하지. 허나 시간이 지나고 조금 진정되자 이건 어쩌면 기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의사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체리드니히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 켠이 간질거렸다. 정말,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정말로? 여태껏 본 적 없던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말하던 체리드니히의 얼굴이 갑자기 생각나는 건 왜일까. 절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왕자님. 테타는 작게 중얼거리며 왼손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빼내어 주머니에 넣었다. 반지가 빠진 손가락엔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반지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체수집이라는 취미를 지닌 체리드니히의 가학적인 성향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카킹국의 왕자로 태어나 한 평생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고, 자신의 것을 빼앗겨 본 적 없는 그는 소유욕 역시 남달랐는데 틈만 나면 테타의 왼손 약지를 깨무는 것이 그랬다. 정말 손가락이 잘리는 건 아닐까,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함께 테타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나면 그제야 깨무는 걸 관두던 체리드니히는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곤 만족스럽게 웃곤 했다. 움푹 패인 잇자국이 사라지고 나면 가려움과 함께 물린 부위가 잔뜩 부풀어 반지를 빼고 싶어도 빠지지 않았고 시퍼런 멍이 사라질 쯤이면 다시 깨물어 흔적을 내는 반복이었다. 이러한 날이 계속 반복되면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손가락이 끊어질 듯한 고통. 자연스레 눈에 눈물이 맺히고 나면 끝나 있으리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은 테타의 귀에 무언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테타의 눈에 비친 건 자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손가락을 보란 듯이 내뱉는 체리드니히의 모습이었다.

체리드니히가 미리 사람을 준비해둔 덕에 수술은 무사히 끝나, 눈에 띄게 생긴 흉터를 제외하면 테타의 일상생활엔 아무런 영향도 가지 않았다. 다행이네, 테타쨩. 천진하게 웃으며 사랑스럽다는 듯이 흉터를 매만지던 체리드니히의 얼굴에선 그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무서웠다.

 

 

 

……누구? 눈을 뜬 체리드니히는 인상을 찌푸리며 처음 보는 사람처럼 테타를 쳐다봤다.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겠어요? 테타의 물음에 그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입안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한번 한 선택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체리드니히와의 결혼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테타였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뭘 망설이고 있는 거야.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셈이야? 자신의 왼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체리드니히의 시선에 테타는 황급히 오른손을 가져와 흉터를 숨겼다.

예전에 당신 밑에서 일했었습니다. 얼마 전에 개인적인 이유로 관뒀는데, 급여 문제로 통화했던 기록 때문인지 저한테 연락이 왔더군요. 다른 분들에겐 연락을 해뒀으니 곧 오실 겁니다. 아직 많이 혼란스러우실 텐데 일어나지 마시고 누워서 쉬는 게 좋겠어요. 금방 사람을 불러올 테니…….

체리드니히의 얼굴에 뭔가 묻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테타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로 됐어. 이젠 정말 끝이야. 죄책감에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병실을 나서는 테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체리드니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에 놓인 꽃병을 오른손으로 단단히 쥔 채 그는 조심스레 테타의 뒤를 밟았고 이내 파열음과 함께 장미꽃잎이 사방에 흩날렸다.

 

 

 

낯익은 천장이 제일 먼저 테타를 반겼다. 분명 병실을 나가는 중이었는데. 극심한 두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일어나려 했으나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게 꼭 몸이 땅속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일어났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겨우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체리드니히였다. 테타쨩……우리 결혼식 때……영원을 맹세했었잖아. 그렇지……? , ……왕자님, 그게, , 저는……. 뒤늦게 상황파악이 된 테타는 결혼식 날을 떠올렸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은 후에도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그때 자신은 뭐라고 했어야 했나. 그렇지만, 제게 선택권이 있긴 했나요? 테타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원망 어린 체리드니히의 눈을 바라봤다. 공포심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정말 기억상실증이었으면 테타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도망친 다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뜯어고쳤으려나? 테타쨩이 생각한 것보다 더 일찍 내 기억이 돌아오면? 그땐? 어떡하려고 했어? 내가 한 번 맞춰볼까? 우린 부부니까, 테타쨩이 뭘 생각하는지 정돈 나도 알 수 있어. 죽을 생각이었지? 그때처럼? , 테타쨩, 떨고 있네. 괜찮아. 전혀 화나지 않았으니까. 원래는 내가 테타쨩을 놀래켜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당할 거라곤 예상 못했어……괜찮아. 싫지 않아. 내가 테타한테 첫눈에 반한 그때처럼 색다르고. 그냥……단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그러니까 미리 싹을 잘라두려고. 내 말……이해하지?

체리드니히의 말뜻을 이해한 테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뭘 하겠다는 건지 말하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왕자님, 왕자님, 제발……. 테타가 쉰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체리드니히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을 뿐이었다. 사실 테타쨩이 잠든 사이에 할까 생각도 해봤거든. 그치만 눈을 떴는데 아킬레스건이 잘려 있으면 아무리 테타여도 놀라지 않을까 싶어서. 동의를 구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과정은 지켜보게끔 해주는 게 맞지 않나 싶었어. 걱정 마. 한두 번 해보는 게 아니라는 건 테타쨩이 제일 잘 알잖아, 그렇지? 금방 끝날 거니까…….

 

 

 

테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그렇지, 꽉 잡아. 체리드니히는 다정하게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힘겹게 걷는 테타를 부축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한 발 한 발 겨우 내딛으며 움직이는 테타에게 시선이 쏠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고로 다쳤다던데, 누가 부축해주지 않으면 혼자 걷기도 힘들다지 아마? 그래도 남편이 체리드니히님처럼 다정한 사람이라 다행이야. 나도 평생 불구로 지내도 되니까 체리드니히님이 보살펴줬으면! 수군거림과 독한 향수냄새에 테타의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사교파티라는 체리드니히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럴 줄은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인 혼자서 서 있을 수도 없게끔 만든 장본인이 체리드니히라는 걸 저 사람들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동정 어린 시선은 익숙해진 지 오래였지만 체리드니히를 애처가라며 칭찬하는 말들은 아무리 들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테타의 다리가 불구가 되고 난 후, 체리드니히는 보란 듯이 테타와 함께 나갈 수 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나가 얼굴을 비췄다. 그는 비록 사고로 제대로 걸을 수도 없게 됐지만 자신이 테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떠들어댔고 각종 매체에선 체리드니히의 이런 지극정성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다리는 괜찮으세요? 잘 지냈냐는 말 대신 다리는 괜찮냐는 말이 안부인사가 될 줄은 몰랐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다가와 테타의 상태를 물었다. 이 사람은 미쳤답니다. 글쎄 제 손가락을 씹어 먹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 다리까지 아작을 냈다니까요? 그쪽도 저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남자 조심해요. 테타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가볍게 미소를 짓곤 체리드니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신의 어깨를 잡은 체리드니히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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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꾸웅큥

2019. 11. 6. 22:49 헌헌

[체리테타] 구애

제가 쓰는 2차 창작 글에선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 원치 않은 결혼, 폭언, 폭력, 생명경시, 자살 및 자살사고, 가스라이팅 등 비윤리적 요소※가 자주 등장하며, 열람 후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일절 책임지지 않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건 과연 언제일까. 마냥 경박스럽다 생각한 웃는 얼굴이 언제부터인가 예뻐 보일 때? 함께 비를 피하다 속눈썹에 맺힌 빗방울을 발견했을 때? 온갖 정나미가 떨어지는 행동에도 어째서인지 곁을 떠나지 못할 때? 영화처럼 첫눈에 반하는 사람들도 있다지 아마. 그리고 체리드니히의 경우에는 바로 지금이었다.

아윽, , 아······. 발을 헛디딘 테타는 체리드니히가 붙잡을 틈도 없이 계단 아래로 추락했고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구르는 걸 멈출 수 있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던 테타의 머리에선 이내 피가 흘러내려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계단에서 떨어지면서 다친 건 머리뿐만이 아닌지 가엾게도 전신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이따금 테타가 다치는 걸 종종 봐온 체리드니히였지만 대개 별거 아니거나 크게 다쳤다 해도 이미 처치가 끝난 후 모습을 드러낸 게 다였기에 눈 앞에서 울컥울컥 피를 쏟아내며 움찔거리는 테타는 체리드니히로선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땅에 쓸려 피와 흙으로 얼룩진 와이셔츠, 뼈가 부러진 건지 정장바지 아래로 드러난 부은 발목······.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심장이 거세게 뛰어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모든 걸 넋을 놓고 바라봤고, 체리드니히가 계단을 내려간 건 테타가 더 이상 신음을 내뱉지도, 몸을 떨지도 않게 되고 난 후였다.

뭘 선물해야 좋아할까. 여지껏 사람이라 하면 성별 관계없이 체리드니히에겐 그저 한낱 유희상대에 불과했기에 누군가의 기준에서 생각한다는 건 머리가 좋은 그에게도 어려운 문제였다. 호감을 사는 법은 잘 알지만 서도······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면모에 이끌려 불나방이 불에 뛰어들 듯 제 곁으로 다가왔었던가. 그냥저냥 준수한 외모에 쌓이다 못해 넘쳐나는 돈, 왕자라는 지위와 뛰어난 두뇌. 아 정말이지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어쩜 이렇게 완벽할 수가! 체리드니히는 국왕이 될 자격이 있는 자는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곤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자신에게 모자란 것은 없었다. 굳이 찾자면야 완벽한 사람에게만 없는 인간적인 면모이리라.

다시 원점으로. 그렇다면 테타는 과연 뭘 받아야 기뻐할까? 체리드니히는 여지껏 만났던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대개 진귀한 보석이나 질 좋고 값비싼 의류, 술 등을 선호했고 간혹 자신과 취향이 비슷하여 동물박제 같은 것들을 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테타는? 반지나 목걸이, 팔찌같은 걸 차는 건 보지 못했는데. 업무가 업무인지라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부하직원들이 명품이라고 불리는 손목시계나 구두, 넥타이를 하고 다니는 걸 보면 그냥 테타 본인이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옷은? 정장은 체리드니히가 모든 부하직원들에게 손수 맞춰줬기에 제외. 어쩌다 한 번 테타의 사복차림을 본 적이 있었는데 옷에도 그렇게 힘을 주는 것 같진 않았지. 그럼 술은? 몇 번 같이 마시자 권해봤지만 전부 거절당했던 걸 생각하면 술 역시 그닥 좋아하진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남은 건 동물박제인가. 동물이라. 동물은 좋아하는 것 같았지. 체리드니히는 테타가 잠깐이지만 본가에서 키운다던 고양이를 메신저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해 뒀던걸 떠올렸다. 테타와 그냥저냥 친하게 지내는 사르코프의 말에 따르면 웬만한 동물은 다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토끼나 햄스터 같은 설치류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박제도 실용성을 찾는 추세라고 했었지. 크기가 작은 게 들고 다니기 용이하니 주로 설치류를 박제해서 동전지갑이나 열쇠고리, 머리띠나 커프스단추로 만들어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예술품에 대체 실용성을 왜 굳이 집어넣는지 체리드니히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체리드니히 본인도 그러하듯 원래 세상엔 별별 취미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기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체리드니히는 곧 바로 사람을 불렀고 모든 건 테타가 모르는 사이 조용히 진행됐다.

주문 넣은 물건을 받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체리드니히는 머리띠에 잘 부착된 다람쥐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과연 전문가의 손길을 거쳐서 그런지 박제된 다람쥐는 금방이라도 찍찍 울며 달려나갈 것 같았다.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고 세척을 하는 등 기타 과정을 거쳤을 텐데도 털 하나 상한 부분이 없어 체리드니히는 내심 감탄을 내뱉었다. 꼭 살아있는 것 같아. 설치류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분명 기뻐하리. 테타가 어떤 표정을 지을 지 상상하자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많이 좋아졌네요. 이제 안 나오셔도 됩니다. 아파도 많이 걸으시고 조심, 또 조심하세요. 테타는 이리저리 발목을 돌려봤고 조금 뻐근한 감은 있었지만 크게 아프진 않았다. 영영 안 나으면 어떡하지 불안해하던 게 벌써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후유증은 없을 거라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발이 부어 꽉 끼던 구두는 어느새 다시 딱 맞았고 사르코프도 웬일로 평소와 달리 헛소리도 안 지껄이고 알아서 일을 처리해냈다. 금목서 향이 서늘한 가을바람을 타고 와 코를 간질였다. 간만에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평화롭고 기분 좋은 하루였다.

테타는 긴장한 내색을 감추며 제 상사가 건넨 선물상자를 받았다. 잘 포장된 선물상자는 누구라도 당장 열어보지 않고는 못 버틸 만큼 척 봐도 고급스러웠다. 테타쨩을 생각하면서 준비했어. 어서 열어봐. 빨리. 체리드니히의 재촉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테타를 스쳐 지나갔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었다가 괜히 큰 화를 입는게 아닐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체리드님이야. 정상적인 걸 선물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테타쨩. 테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한 번 재촉하는 상사를 흘겨봤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표정 너머엔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빨리 열기나 하라는 무언의 압박감이 전해졌고 테타는 떨리는 손으로 선물 포장을 풀었다.

이게 뭐지? 사람은 생각치도 못한 것을 접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하기 마련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당연하게도 다람쥐였다. 배를 바짝 붙이고 조그만 손발로 가느다란 머리띠를 단단하게 붙잡은 다람쥐는 꼭 살아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있었던 것이었지만. . . .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테타는 홀린 듯이 머리띠 끝부분을 매만졌다. 매끄러운 감촉과 눈 앞의 기괴한 풍경에 테타의 손가락은 어느새 다람쥐 꼬리에 닿아 정신을 차렸을 땐 다람쥐의 의안과 눈이 마주친 후였다. 모피라곤 생각되지 않는 부드러운 털의 감촉, 까맣고 반짝이는 눈동자는 살아있는 듯 생생했지만 동시에 텅 비어 있어 마치 테타의 영혼을 갈구하는 듯했다. 토할 것 같아. 목 뒤로 식은땀이 흘러 머리카락과 들러붙은 게 느껴졌다.

이게, 이건 대체······.

설치류를 좋아한다고 들었거든. 처음엔 토끼나 기니피그로 할까 고민했는데 이왕이면 늘 지니고 다닐 수 있도록 실용적인 게 좋겠다 싶어서. 악세서리로는 흰쥐가 유행이길래 그걸로 할까 했는데 여자들은 귀여운 걸 좋아하지? 그냥 흰쥐보단 다람쥐가 더 나을 것 같아서 말야. 한 마리, 한 마리 테타쨩을 생각하며 상하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죽인 후에 가장 예쁜 걸로 고른 거야. 물론 박제는 사람을 시켰지만. 어때, 마음에 들어?

 

 

 

그런 표정을 지을 거라곤 전혀 예상도 못했어. 테타쨩 성격에 대놓고 기뻐할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그런 표정을 보려고 준비했던 건 아니었는데. 뭐가 문제였던 걸까. 목걸이나 팔찌는 거추장스러울까봐 일부러 평소에도 하고 다닐 수 있는 머리띠로 고른 거였는데 말이지. 역시 그냥 토끼로 할 걸 그랬나. 어렵네. 너는 어떻게 생각해?

, 으윽, 아······. 귀가 멍멍해질 때까지 소리를 지르던 여자는 이제 지를 힘도 남지 않았는지 짧은 신음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뒀다. 진한 향수냄새와 피냄새가 뒤섞여 지독하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러 댔다. 체리드니히는 피가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어쩜 이렇게 머리에 든 게 없는지.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그냥 시간낭비라니. 사람을 불러 얼른 치워버리려던 그의 눈에 유독 띄는게 있었는데,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잘 정리되어 알록달록 색칠된 손톱들은 빛을 받아 반짝반짝거리는 게 보석 같기도 했다. 길쭉한 데다 모양도 가지런한 게 분명 평소 부지런히 관리를 받으러 다닌 덕분이리라. 그러고 보면 여지껏 죽여왔던 여자들의 열에 일곱은 이런 식으로 손톱과 발톱에 엄청 공을 들였었지. 여자들은 보통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테타의 손은 어땠더라.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채 바짝 깎아 늘 깔끔한 상태를 유지했었다. 순전히 테타의 성격 탓이었지만 경호 일과 자신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체리드니히는 생각했다. 치장하는 것에는 관심 없어도 알록달록하고 반짝반짝 예쁜 걸 싫어하는 여자는 체리드니히가 알기론 없었기에 그는 당장 사람을 불렀다.

체리드니히는 알록달록한 손톱들이 가득 들어있는 유리병을 황홀한 듯 바라봤다. 살짝 흔들어보니 달각달각 기분 좋은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 정말이지 남자인 내가 봐도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테타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번에는 기뻐해줄까? 눈앞의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동안 몇 명의 여자를 잡아와 손톱이 상하지 않게끔 뽑느라 고생했던가. 노력에 비례해 차곡차곡 유리병에 쌓여가는 색색의 손톱들을 보며 마음 졸이던 날들이었다. 노력은 보상 받기 마련이니 이번에야 말로 테타도 기뻐할 게 틀림없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씩이나 실패하다니. 연이은 실패에 체리드니히는 수치스러워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지껏 무언가를 크게 실패해본 적 없는 그였기에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실패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아아,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해 유리병이 깨지던 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포장을 풀던 테타. 유리병에 가득 찬 노력의 결실들. 이게 대체 뭐냐는 테타의 물음에 친절하게 테타쨩을 생각하며 그동안 하나하나 뽑고 세척하고 말린 거라고 대답한 자신과 자신의 말이 끝나자 마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선물을 건네받은 손을 덜덜 떨던 테타. 손에 힘이 빠져 유리병은 차갑고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깨졌고 유리조각과 함께 나뒹굴던 노력의 결실들까지. 정말 모든 게 엉망이었다. 모든 게. 이대론 안되겠다 생각한 그는 자존심이 상하지만 테타와 가장 친한 사르코프에게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받아들일 때가 됐다) 조언을 구했고 상대방에게 뭘 선물해야 할 지 고르기 힘들 땐 자신이 아끼는 걸 주는 것도 괜찮다는 대답을 받게 된다.

아끼는 물건. 아끼는 물건이라. 체리드니히는 자신의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여지껏 힘들게 모은 컬렉션이 여기저기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유명 피아니스트의 손가락부터 자신이 직접 벗겨낸 남자 모델의 두피 가죽까지. 모두 마음에 드는 것들이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꼽자면 역시 쿠르타족의 안구, 그 중에서도 어린 소년의 머리채로 보존된 것이었다. 머리채로 있는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된 것은 드물었기에 체리드니히가 특히 아끼는 물건이었다. 진한 흑갈색의 머리카락에 흰 피부, 원망하는 듯한 아름다운 붉은 눈은 살아 생전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아깝긴 하지만 테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야 이 정도는.

 

 

 

여태까지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는데. 테타는 지금 이 순간 퇴사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젤까. 이제 컬렉션 모으는 건 질리신 건가. 그래서 이렇게 날 괴롭히는 거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이후로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테타는 여지껏 체리드니히에게 선물 받았던 것들을 떠올렸다. 박제된 다람쥐가 장식되어 있던 머리띠, 장미꽃다발 속에 숨어있던 붉은 눈 한 쌍, 얼마 전엔 손톱이 꽉 찬 유리병을 받았었고 오늘은······. 침대 옆에 위치한 테이블 위엔 체리드니히의 방에 고이 모셔져 있던 어린 소년의 머리가 보존액에 절여진 채 병에 담겨 테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붉은 눈을 쳐다보자니 편두통이 몰려왔다. 이거 내가 엄청 아끼는 건데 특별히 테타쨩 줄게. 가끔 방에 들러서 확인할 테니까 잘 간직해야 해? 그렇게 말하던 체리드니히는 신기하게도 조금의 악의도 없는 얼굴이었고 일개 부하직원인 테타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 따위 조금도 없었지만 사회생활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차라리 체리드님이랑 매주 등산을 가는 게 낫겠어. 거기까지 생각한 테타는 헉 소리를 내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정정했다.

정말 어쩌지. 경매에 팔아버리면 곧 바로 체리드니히의 귀에 들어가리라.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갖다 버리고 싶었지만 최근 체리드니히가 일이 끝난 후에도 이따금 방에까지 찾아오며 집요하게 귀찮게 굴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다간 미쳐버릴 지도 몰라. 역시 답은 퇴사밖에 없어. 어쩌자고 왕자의 경호원을 자처했을까. 테타에게 있어서 체리드니히의 최측근 경호원이란 자리는 아무런 메리트도 없었다. ,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붉은 눈의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괜한 오싹함에 고개를 돌렸다. 정말 관두고 싶다. 허나 당장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테타는 사표를 작성하는 대신 보존액에 둥둥 떠있는 머리를 옆에 두고 마지못해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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