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22. 00:35 헌헌
[체리테타] 사랑의 강제 뮤틸레이션
제가 쓰는 2차 창작 글에선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 원치 않은 결혼, 폭언, 폭력, 생명경시, 자살 및 자살사고, 가스라이팅 등 비윤리적 요소※가 자주 등장하며, 열람 후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일절 책임지지 않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은 후에도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분명 머리부터 발끝까지 뭐 하나 빠짐없이 맞춤 제작되어 몸에 걸쳐졌을 텐데. 꼭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모든게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형식적인 질문에 테타는 체리드니히를 바라봤다. 맹세합니다. 그는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테타의 눈을 마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숨이 턱 하고 막혀오는 듯했다. 맹세합니다. 테타의 입에서 자신과 같은 말이 나오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체리드니히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이 상황에서 다른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테타는 혹여나 깰까 조심스런 손길로 체리드니히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기억상실증이라고 했다. 정말 한 치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통 이렇게까지? 미간을 짚은 테타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않냐는 체리드니히의 성화에 못 이겨 요트를 탔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남들이 그러하듯 준비해둔 와인을 꺼내 마시며 서로 사랑을 속삭였다. 술기운이 오르고 당연히 손을 댈 거라 생각했던 테타의 예상과 달리 체리드니히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요트 앞머리로 향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취했던 탓인지 그대로 바다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다행히 바로 구조대원이 투입되어 눈에 크게 띄는 외상은 없어 안심했는데 기억상실증이라니! 기억이 돌아오는 건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나 듣던 대사를 실제로 듣게 될 줄은 몰랐던 테타였다.
기억상실증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골 때린다”였다. 결혼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사고가 나도 이런 대형사고가 나는지. 테타는 그의 옆에만 있으면 세상 골 때리는 일은 전부 일어나는 것 같다고 결혼 전부터 사르코프에게 자주 투정을 부리곤 했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니. 정말 그러면 어떡하지. 허나 시간이 지나고 조금 진정되자 이건 어쩌면 기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의사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체리드니히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 켠이 간질거렸다. 정말,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정말로? 여태껏 본 적 없던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말하던 체리드니히의 얼굴이 갑자기 생각나는 건 왜일까. 절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왕자님. 테타는 작게 중얼거리며 왼손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빼내어 주머니에 넣었다. 반지가 빠진 손가락엔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반지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체수집이라는 취미를 지닌 체리드니히의 가학적인 성향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카킹국의 왕자로 태어나 한 평생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고, 자신의 것을 빼앗겨 본 적 없는 그는 소유욕 역시 남달랐는데 틈만 나면 테타의 왼손 약지를 깨무는 것이 그랬다. 정말 손가락이 잘리는 건 아닐까,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함께 테타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나면 그제야 깨무는 걸 관두던 체리드니히는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곤 만족스럽게 웃곤 했다. 움푹 패인 잇자국이 사라지고 나면 가려움과 함께 물린 부위가 잔뜩 부풀어 반지를 빼고 싶어도 빠지지 않았고 시퍼런 멍이 사라질 쯤이면 다시 깨물어 흔적을 내는 반복이었다. 이러한 날이 계속 반복되면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손가락이 끊어질 듯한 고통. 자연스레 눈에 눈물이 맺히고 나면 끝나 있으리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은 테타의 귀에 무언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테타의 눈에 비친 건 자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손가락을 보란 듯이 내뱉는 체리드니히의 모습이었다.
체리드니히가 미리 사람을 준비해둔 덕에 수술은 무사히 끝나, 눈에 띄게 생긴 흉터를 제외하면 테타의 일상생활엔 아무런 영향도 가지 않았다. 다행이네, 테타쨩. 천진하게 웃으며 사랑스럽다는 듯이 흉터를 매만지던 체리드니히의 얼굴에선 그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무서웠다.
……누구? 눈을 뜬 체리드니히는 인상을 찌푸리며 처음 보는 사람처럼 테타를 쳐다봤다.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겠어요? 테타의 물음에 그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입안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한번 한 선택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체리드니히와의 결혼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테타였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뭘 망설이고 있는 거야.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셈이야? 자신의 왼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체리드니히의 시선에 테타는 황급히 오른손을 가져와 흉터를 숨겼다.
예전에 당신 밑에서 일했었습니다. 얼마 전에 개인적인 이유로 관뒀는데, 급여 문제로 통화했던 기록 때문인지 저한테 연락이 왔더군요. 다른 분들에겐 연락을 해뒀으니 곧 오실 겁니다. 아직 많이 혼란스러우실 텐데 일어나지 마시고 누워서 쉬는 게 좋겠어요. 금방 사람을 불러올 테니…….
체리드니히의 얼굴에 뭔가 묻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테타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로 됐어. 이젠 정말 끝이야. 죄책감에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병실을 나서는 테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체리드니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에 놓인 꽃병을 오른손으로 단단히 쥔 채 그는 조심스레 테타의 뒤를 밟았고 이내 파열음과 함께 장미꽃잎이 사방에 흩날렸다.
낯익은 천장이 제일 먼저 테타를 반겼다. 분명 병실을 나가는 중이었는데. 극심한 두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일어나려 했으나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게 꼭 몸이 땅속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일어났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겨우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체리드니히였다. 테타쨩……우리 결혼식 때……영원을 맹세했었잖아. 그렇지……? 아, 아……왕자님, 그게, 전, 저는……. 뒤늦게 상황파악이 된 테타는 결혼식 날을 떠올렸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은 후에도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그때 자신은 뭐라고 했어야 했나. 그렇지만, 제게 선택권이 있긴 했나요? 테타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원망 어린 체리드니히의 눈을 바라봤다. 공포심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정말 기억상실증이었으면 테타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도망친 다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뜯어고쳤으려나? 테타쨩이 생각한 것보다 더 일찍 내 기억이 돌아오면? 그땐? 어떡하려고 했어? 내가 한 번 맞춰볼까? 우린 부부니까, 테타쨩이 뭘 생각하는지 정돈 나도 알 수 있어. 죽을 생각이었지? 그때처럼? 아, 테타쨩, 떨고 있네. 괜찮아. 전혀 화나지 않았으니까. 원래는 내가 테타쨩을 놀래켜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당할 거라곤 예상 못했어……괜찮아. 싫지 않아. 내가 테타한테 첫눈에 반한 그때처럼 색다르고. 그냥……단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그러니까 미리 싹을 잘라두려고. 내 말……이해하지?
체리드니히의 말뜻을 이해한 테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뭘 하겠다는 건지 말하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왕자님, 왕자님, 제발……. 테타가 쉰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체리드니히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을 뿐이었다. 사실 테타쨩이 잠든 사이에 할까 생각도 해봤거든. 그치만 눈을 떴는데 아킬레스건이 잘려 있으면 아무리 테타여도 놀라지 않을까 싶어서. 동의를 구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과정은 지켜보게끔 해주는 게 맞지 않나 싶었어. 걱정 마. 한두 번 해보는 게 아니라는 건 테타쨩이 제일 잘 알잖아, 그렇지? 금방 끝날 거니까…….
테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그렇지, 꽉 잡아. 체리드니히는 다정하게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힘겹게 걷는 테타를 부축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한 발 한 발 겨우 내딛으며 움직이는 테타에게 시선이 쏠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고로 다쳤다던데, 누가 부축해주지 않으면 혼자 걷기도 힘들다지 아마? 그래도 남편이 체리드니히님처럼 다정한 사람이라 다행이야. 나도 평생 불구로 지내도 되니까 체리드니히님이 보살펴줬으면! 수군거림과 독한 향수냄새에 테타의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사교파티라는 체리드니히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럴 줄은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인 혼자서 서 있을 수도 없게끔 만든 장본인이 체리드니히라는 걸 저 사람들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동정 어린 시선은 익숙해진 지 오래였지만 체리드니히를 애처가라며 칭찬하는 말들은 아무리 들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테타의 다리가 불구가 되고 난 후, 체리드니히는 보란 듯이 테타와 함께 나갈 수 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나가 얼굴을 비췄다. 그는 비록 사고로 제대로 걸을 수도 없게 됐지만 자신이 테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떠들어댔고 각종 매체에선 체리드니히의 이런 지극정성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다리는 괜찮으세요? 잘 지냈냐는 말 대신 다리는 괜찮냐는 말이 안부인사가 될 줄은 몰랐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다가와 테타의 상태를 물었다. 이 사람은 미쳤답니다. 글쎄 제 손가락을 씹어 먹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 다리까지 아작을 냈다니까요? 그쪽도 저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남자 조심해요. 테타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가볍게 미소를 짓곤 체리드니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신의 어깨를 잡은 체리드니히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면서.